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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전전긍긍' 하는 마음을 만나다

by 북드라망 2023. 7. 20.

'전전긍긍' 하는 마음을 만나다

 


꽃구경 가는 마음으로
5월, 걷기도 좋은 날씨에 만발하는 꽃들에 눈까지 즐거운 철이다. 동네에도 야산에도 눈길이 가는 곳마다 꽃들이 피어 있다. 꽃 보는 즐거움까지 누리며 걷기 좋은 길을 찾다가 경기옛길 평해길 3코스로 정했다. 이 코스는 남한강 자전거길과도 겹쳐서 남한강 줄기를 따라 걸을 수도 있다. 팔당역에서 시작해 운길산역이 종점이라 교통도 편리하다. 이번에는 운길산역에서 시작해 팔당역으로 걷기로 했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운길산역에 내리니 등산객들이 많이 보였다. 운길산에 있는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를 바라볼 수 있어서 유명하다고 한다. 역 주변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니 평해 3길은 ‘정약용길’이기도 했다.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의 생가와 마재 성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코스였다. 자연 경관에 유적지까지 탐방할 수 있다니 걷기의 품격도 한뼘 업그레이드 된 것 같아 으쓱해졌다. 일단 남한강 자전거길로 접근할 수 있는 표지판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근처에 지금은 폐선이 된 북한강 철교가 있다고 해서 안내판을 따라 갔다. 레일 위로 나무 데크를 깔아 놓은 철교를 건너면서, 오래된 철교의 구조물이 주는 운치를 포착해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어설프게 한 컷 찍어보았다. 강을 건너서 계속 걸었는데 길의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반대방향으로 다시 철교를 건너고 한참을 되돌아와서야 정약용길 표지판을 찾았다. 남한강을 따라 난 길 주변에 핀 아카시아와 찔레꽃 향기 덕분에 길을 헤매는 헛수고도 나름 괜찮았다.
 



정약용의 유적지에서
경의중앙선 노선이 변경되면서 폐역이 된 능내역까지 지나고 나니 정약용 유적지가 있는 마재 마을로 들어섰다. 마재 마을은 정약용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벼슬시기를 거쳐 십팔 년의 유배기를 지나 다시 돌아와 여생을 마친 곳이라고 한다. 천주교도였던 정씨 사형제를 기리는 마재 성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성지를 둘러보다가 유난히 탐스러운 흰 꽃봉오리가 눈길을 끌었다. 돌아온 후 무슨 꽃인가 찾아보니 불두화 라는데, 승려의 머리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재밌는 조화다.

마재 성지를 나와서 야트막한 고개길을 넘어가니 정약용의 생가와 묘지,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는 유적지로 들어섰다. 실학자인 정약용의 저작을 바닥에 새겨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웬만해서는 쉬이 헤아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저작들이었다. 생가로 꾸며둔 건물들을 둘러보고 묘역도 가 보았는데, 정약용이 생전에 ‘자찬묘지명’을 지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념관에는 묘지명의 내용이 일부 소개 되어 있었다. “육경과 사서의 연구로 수기(修己)를 삼고, 일표이서로 천하 국가를 위했으니, 본과 말을 구비한 것이다.” 라는 문장도 있었다. 공부로 일가를 이룬 삶의 자부심 뿜뿜 하는 문장이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공정하고 청렴하게 직무를 수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던 그는 정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신유박해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정약용의 저작은 대부분 유배지에서 쓰여 졌는데 대략 500여권에 이른다고 한다. 『주역』 『시경』 『서경』 등을 탐구하고 사서를 주석하고,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지어서 “모두 성인의 경전을 근본으로 두되, 시대에 부합하도록 힘썼으니 이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더러 인용해서 쓸 만한 내용이 있을” 것이라 밝혀 두었다. 정약용의 제자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유배기에 이렇게 방대한 저술을 하는 동안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과골삼천踝骨三穿) 유배의 화를 당하여 이러한 저작물을 남겼으니 전화위복이라 치기에는 그의 복사뼈가 세 번이나 뚫어진 고통이 무겁게 와 닿았다.

 


 
전전긍긍 공부하는 마음을 만나다
유적지와 실학 박물관까지 둘러보고 이정표를 따라가니 다산 생태공원에 이르렀다. 남한강 기슭에 조성된 생태 공원은 휴일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북적였다. 강을 바라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의자들도 잘 정비되어 있었고, 잔디밭에 돗자리도 널찍하게 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강가를 따라 걷다가 흔들 그네에 자리가 나서 간식을 먹으며 한참을 남한강을 바라보았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정약용은 북한강을 따라 춘천을 거쳐 화천까지 배를 타거나 걸어서 유람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흐르기를 멈추지 않았을 강물이 그와 나를 이어주었을까. 정약용의 공부하는 마음이 나의 마음에도 흘러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책꽂이에서 『다산학 공부』 라는 책을 찾아서 펼쳤다. 정약용이 만년에 남긴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온통 녹색인 조그마한 개구리가
한평생 단정하게 매화나무에 앉아 있네

제가 감히 높이 날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산 채로 닭 배 속에 매장될까 겁나서네.

「여름날 전원」 24수 중 제13수 『다산학 공부』에서 발췌


먹이를 쪼는 닭 부리의 집요한 공격의 사정권 안에서 평생을 긴장하면서도 그 장(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감당한 청개구리의 긴장이 느껴진다. 성군을 만나 “품은 생각이 있으면 조목조목 진술”하고 그에 대한 답을 들었던 시절은 너무 짧았다. 정적(노론세력)들의 표적이 되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시간은 기약이 없었다. 증자가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손발이 온전하도록 전전긍긍(戰戰兢兢) 했다는 고백의 마음이 이랬을까. 그럼에도 만년까지 순정(醇正)한 그 마음은 여전히 푸릇푸릇하다. 공부하는 마음, 불화하는 세계에 산 채로 삼켜질까 전전긍긍하는 그 마음을 손톱만큼이나마 가늠해보는 시간이었다.

 

 

 

글_기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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