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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발굴!한서라는역사책] 제국의 여름은 어떻게 오는가(2)

by 북드라망 2020. 8. 12.

제국의 여름은 어떻게 오는가(2)


 

엎치락 뒤치락, 유학과 황로학




앞서 보았듯 무제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위해 유자들을 대거 등용하자 무위지치를 강조했던 황로학이 뒤로 밀려나고 유학이 득세한다. 무제는 문경제와 달리 부국강병을 위한 욕망이 강했고 진나라의 전철을 밟을 위험성도 동시에 커졌다. 이때 무제의 숙부이자 회남의 왕, 유안은 이 위험성을 감지하고 무제에게 무위 정치를 상기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 첫 번째 노력으로 유안은 빈객들을 모아 황로학을 집대성한다. 그 결과 나온 저술이 『회남자』이다. 


“(중략) 그 당시 무제도 학문을 좋아했기에 유안을 숙부로 받들었고, 언변에 박식하고 문사가 뛰어난 유안을 매우 존중하였다. 무제가 유안에게 서신이나 서단을 하사할 때는 먼저 사마상여 등을 불러 초안을 보여주어 검토케 한 다음에 보내곤 하였다. 그전에 유안이 입조하여 자신의 (회남자) <내경>을 바쳤고 이어 새로운 저술이 나올 때 마다 무제는 아끼며 비장하였다.”


「회남형산제북왕전」,『한서』 3권, 명문당, 177쪽


유안은 황로학의 비전으로 충만한 저술 『회남자』를 바쳤지만 무제의 제국 팽창을 위한 욕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안은 포기하지 않고 전쟁을 막는 상소를 계속 올리면서 정치의 방향을 무위로 틀고자 했다. 유안이 우려했던 유가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유가는 ‘인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왕의 자질에 따라 영토 확장의 욕망으로 변질되기 쉬웠다. 황로학은 유가처럼 백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일하는 성군이 되기 전에 ‘도와 하나가 되라’고 요청한다. 현명한 통치자는 세속적인 것을 넘어 ‘세상의 근원’을 보는 것부터 하라는 것이다. 이런 시선의 전환은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고, 흥망은 번갈아 온다는 것. 또한 만물은 하나의 도에서 나왔으므로 이질적인 것들은 공존해야 제국이 살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목적으로 한다. 무위지치는 역설의 통치이다. 결국 왕이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면 제국 유지를 위해 전투 기계가 되는 욕망을 버리고 부드럽고 약하고 유연한 통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황로학의 힘, 도덕적 자기 수양


 매우 이상적으로 보이는 황로학이 현실에서 적용될까 싶지만 한나라 문제와 경제는 무위지치가 가능함을 멋지게 증명해 보였다. 비법은 다른 게 아니라 왕의 ‘도덕적 수양’이 관건이었다. ‘자애로움, 검소함, 천하를 위해 나서지 않음’ 이것을 문제와 경제는 철저하게 실천했다. 


“문제는 검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총애하는 신부인의 옷도 땅에 끌리지 않았고, 휘장에 수를 놓지도 않아 돈후질박한 생활로 천하에 솔선하였다. 패릉을 조성하면서도 질그릇을 사용하였고, 금은 또는 구리나 주석으로 장식하지 않았으며, 산의 형세에 따랐고 봉분을 만들지도 않았다.”


「문제기」,『한서』 1권, 명문당, 252쪽


이처럼 문제는 황제 즉위 후 저고리 하나를 계속 기워 20년 간 입었고, 형벌과 조세를 가볍게 고쳤다. 그렇게 30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안정되었고 풍속이 바뀌었다고 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무위의 정치가 생명을 살리는 정치임을 ‘왕의 수행’을 통해 몸소 보여준 것이다. 예컨대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는다. 이익은 일신의 재앙이다. 부는 집안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자신을 윤택하게 한다. 이것은 당위가 아니었다. 자연의 이치를 사무치게 깨닫는 과정, 도덕적 수양을 통해야만 가능한 실천이었다.


“덕(德)이 쇠퇴한 이후에 인(仁)이 생겨나고, 행위에 문제가 생긴 이후에 의(義)가 세워지며, 마음의 조화가 상실된 이후에 음악이 필요해지고, 예(禮)가 음란하게 된 이후에 용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명(神明)을 알면 도덕(道德)을 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인의를 알면 예악(禮樂)을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근본을 등지고 말단을 추구하고 핵심을 놓아 버리고 지엽을 찾고 있으니, 더불어 지극한 도리를 논할 수 없다.”


「본경」,『회남자』 1권, 소명출판, 436쪽


인의는 방편에 불과할 뿐이고 근본인 도덕을 상기하여 본성을 회복하라는 것. 근본을 잃어버리면 인의예악이라는 표상을 모방하게 된다. 왕도 자기 수양보다는 백성들 위한다는 명분으로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때 인자와 의자는 근본을 잃고 부국강병을 위한 유능한 자가 되어 본성과 분리된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안은 무위 정치를 펼치기 위해 흉노 정벌을 적극 말리기도 한다. 제국이 아무리 커져도 다양성의 공존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 이질적인 모든 것은 하나의 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제후국 유안에게 이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였다. 그리고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 일임을 무제에게 깨우쳐 주고자 했다. 다음은 유안이 무제에게 올린 전쟁 반대 상소문의 일부이다. 


“월 땅은 이적이 사는 곳으로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중국의 법도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예전 삼대의 융성 이후로 흉노와 월인은 중국의 책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강한 힘이 아니면 복속시킬 수 없고 위압이 아니면 제어할 수 없었으며,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며 다스릴 수 없는 백성이고 중국인이 마음을 쓸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중략) 한이 건국된 이후 72년에 오월의 사람들이 서로 공격한 것은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나 그간에 천자께서는 거병하여 군사를 그 땅에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엄주오구주보서엄종황가전(상)」, 『한서』 5권, 명문당, 279쪽


“신이 알기로, 전쟁이 있은 뒤에는 꼭 흉년이 든다고 하는데 이는 백성들 고생과 한숨의 기운이 음양의 조화를 깨트리고 천지의 정기를 건드려 재앙의 기운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폐하의 성덕은 천지와 짝하고 그 밝기는 일월과 같으며, 은택은 금수나 초목에도 미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굶주림과 추위로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자가 있다면 마음은 얼마나 처참하겠습니까. 지금은 겨우 나라가 평안해졌는데 폐하의 사졸이 죽어 중원에서 뒹굴고 산골짜기를 메우며 변경의 백성은 일찍 닫고 늦게 열며 아침에 저녁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니 신은 폐하를 위해 이를 말리려는 것입니다.”


「엄주오구주보서엄종황가전(상)」,『한서』 5권, 명문당, 283~284쪽


무위 정치를 하도록 코치했던 유안은 끝내 모반으로 인해 자살한다. 유안은 왜 모반을 해야 했을까. 무제가 황로의 길을 가지 않으니 자신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걸까. 제후국의 소멸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구책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변호하려고 해도 유안의 모반은 부정될 수 없다. 그럼에도 유안의 공 또한 무시될 수 없다. 무제는 진시황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이것은 유안이 황로학의 비전을 무제에게 계속 상기시켰기 때문에 가장 번성했지만 동시에 폭발 위험성 있는 한나라의 여름은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양적인 단순 비교만 해도 진나라가 14년 만에 멸망한 것에 비해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을 포함해서 400년 동안 건재했다. 그것뿐인가. 한나라하면 중국 문명의 자부심이 된 것도, 그 이후 중국 역사에서 한나라가 롤 모델이 된 것은 모두 ‘황로학’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로학, 한나라가 탄생하기 전까지 이런 통치학은 없었다. 제국 한나라를 지속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저항과 해체의 힘이 반드시 필요다다. 쉽게 말해 음식을 먹으면 그것을 소화시켜서 비워야 하는 것처럼. 제국이 커질수록 영토 확장의 욕망이 커지는 시대에 황로학은 음식을 더 많이 먹기보다는 소화를 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춘 통치학인 것이다, 열심히 무엇을 하기보다는 휴식을, 속도를 내기보다는 느림을, 능력을 중시하기보다는 각자의 고유성이 발현되게, 성공보다는 내 몸의 생명력을 기르는 것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통치술. 노자 7장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천지의 영원성에 대해 말한 대목이 생각난다. 왕이 과인이라고 칭한 것도 허물이 많은 자라는 표현이다. 대궐에서 궐도 흠이 있다는 뜻으로 겸손함을 담고 있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낮추기 위해 명칭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하여 황로학에서 천자는 천하를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천하와 소통하는 자이다. 한나라 제국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겉은 유학을 표방한다 해도 그 아래 자기 수양을 기반으로 한 황로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덧달기, 몸과 우주에 대한 탐구 대폭발의 시대와 황로학


무위지치는 몸과 우주의 원리가 하나임을 강조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폭발적으로 자연철학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의 발전은 ‘방사의 출현’과 관계가 깊다. 방술의 시조는 전국시대 음양가의 대표 추연이다. 진시황은 음양오행설을 채용한다. 처음에는 주역과 무관했지만 점차 역과 결합하여 중국 특유의 자연학으로 자리 잡는다. 방사는 노장과 결합하여 신선술로 발전한다. 방사들은 지금 시대로 치면 과학자 그룹이다. 방사들이 부정적으로 기술되는 것은 사마천이나 반고 등 역사 기록자가 유자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자들도 방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 중 유자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방사는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이었다. 지금도 권력과 재벌에 붙어서 기생하는 술사들이 있지 않은가. 현대 사회에서도 과학 기술이 생명을 담보로 개발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원래 방사의 기본 목표는 ‘인간의 자기완성’에 있다. 그 당시 마음과 몸이 연결되어 있고 우주와 합일되기 위한 실험들이 시행된다. 방사의 대표 활동인 신선술은 심신훈련법, 도인과 내단 등으로 정교하게 발전한다. 이런 발전이 가능한 것은 자연철학이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등장과 자연 과학을 통한 신선술이 결합하여 인류의 최고의 심리, 생리, 윤리가 결합된 의학 텍스트 『황제내경』도 이런 분위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폭발적인 자연 철학의 발전이 수양의 필요성을 검증해 주었기에 문제와 경제 또한 확신을 가지고 심신을 단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과학 기술의 성과는 놀랍다. bC.165년에 최초의 태양흑점 관측기록이 있고, bc28년부터 정사에 일시가 정확히 기록되기 시작했다. 지도 제작에 바둑판식 배치가 도입하여 위치와 거리를 정확히 계산하는 방법이 2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나침판이 발명되었고 『한비자』와 『귀곡자』에 자석 기술이 언급된다. 『황제내경』에 이은 『상한론』, 『사기』 중 「천관서」 등이 나온 것도 이 시대이다. 동중서가 공맹의 초기 유학이 아닌 유학에 자연학을 결합한 것도 이런 시대적 움직임과 맥을 같이한다. 이런 자연 철학 발전에 사상적 지침이 된 것은 『역경』이었다. 『주역 참동계』라는 수행서가 있는데 이것도 역을 바탕으로 한 심리와 생리의 수행서이다. 이 시대에 『역경』은 사상과 자연 철학 등 모든 분야의 원류가 되는 역할을 해 주었다.


우리 시대에 에너지를 중심으로 과학이 설명되듯 한나라 때는 기에 대한 관찰이 모든 분야를 꿸 수 있는 입구를 열어주었다. 의학, 정치, 군사, 천문, 지리, 인사 등에 이르기 까지 기의 매커니즘에 의해 설명이 가능해졌다. 몸과 우주의 정치 경제학인 황로학은 이렇게 자연철학의 발전에 힘입어 발생한 통치학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황로학의 무위 정치는 생리와 심리의 이해를 통한 자기완성을 통해 문경지치 같은 태평성대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국가 또한 대우주이자 큰 몸이므로 정치 군사에서 천문현상까지 아우르면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의 감응 관계를 기본으로 한 양생, 일상, 정치, 경제 등 인간 전반에 걸쳐 생명의 길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보통 중국 사상하면 유불도가 회통한다고 말한다. 보통 유학이 통치 비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유불도의 시작점은 한나라의 통치학, 황로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불교가 중국에 쉽게 안착한 것도 황로학 덕분이다. 황로학하면 황제의 개인적 신선술 정도로 생각할 뿐 제국의 비전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한나라의 여름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모든 동아시아 국가 통치술에는 근본을 질문하는 황로학의 비전이 바탕이 되고 있음을 잊지 마시라. 


글_박장금(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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