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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소리객소리딴소리] “청소는 인사하는 일”

by 북드라망 2023. 8. 23.

“청소는 인사하는 일”
 

매일 밤 잠들기 전 책을 읽는다. 소리 내어 읽는 사람은 나지만 듣는 사람은 딸이다. 글자를 알게 되면 책을 저 혼자 읽을 줄 알았는데, 웬만하면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꼭 읽어 달라고 한다. 딸이 자라면서 읽는 책의 장르가 많이 바뀌었다. 일곱 살이 되고부터는 글자가 적은 그림책들만이 아니라 글자가 제법 되는 전래동화나 글자가 꽤 많은 어린이동화류를 읽게 되면서 같이 흥미진진해하며 흥분하기도 하고,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기도 하고, 아직 나오지 않은 다음 권을 같이 기다리기도 하는 일이 잦아졌다.

몇 주 전 그런 어린이동화류 중에 한 권을 읽다가 거의 오열을 한 일이 있었다(사실 엄마들이 애들 책 읽어주다 엄마만 울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다들 몇 번은 경험하는 일이더라). 『만복이네 떡집』(김리리 지음)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둥실이네 떡집』인데, 마무리되는 부분에 나오는 둥실이의 행동에 갑자기 감정이 폭발했다. 이 ‘떡집’ 시리즈는 이미 명성이 높지만 개인적으로 작가가 일방적인 교훈이나 클리셰 등을 삼가며 구성면에서나 문체면에서나 모두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떡집’ 연작은 아이의 고민을 해결해 줄 ‘떡’을 만드는 삼신할머니와 꼬랑지가 있고, 그 떡을 먹고 고민을 해결해 가는 각 권마다의 주인공 아이가 있는데, 『둥실이네 떡집』에는 아기를 밴 채 배고픔에 시달리던 길고양이 둥실이를 우연히 만나 함께 살게 된 여울이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이 다음에 이야기의 결말 부분을 다룰 텐데, 충분히 예상 가능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라 스포일러가 될까 싶긴 하지만 혹시 민감한 분들은 다음 단락은 건너뛰셔요.)

 


고양이 둥실이는 여울이와 여울이 엄마의 보살핌으로 아기들도 무사히 출산하고 여울이네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함께 산 지 1년이 되는 때에, 둥실이가 병에 걸려서 얼마 못 살 거라는 진단을 받는다. 여울이는 아픈 둥실이로 인해 고민하고, 떡을 만드는 꼬랑지가 비법책을 통해 몇 가지 떡(봄바람에 살랑살랑 날리는 매화처럼 몸이 가벼워지는 매화떡을 비롯해서)을 만들어 주는데, 가장 마지막에 주는 떡은 ‘마지막 소원을 이루게 해주는 망개떡’이었다. 

망개떡을 먹고 잠들었던 둥실이는 깨어나서 앞발에 침을 묻히다가 자신이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아챈다. “둥실이는 떡을 먹으면서 사람이 되는 상상을 했어. 사람이 되어서 꼭 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김리리, 『둥실이네 떡집』, 비룡소, 2022, 67쪽) 둥실이가 사람이 되어서 꼭 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 바로 청소였다. 둥실이가 자기 꼴이 말이 아니라며(그동안 아파서 고양이세수도 못했던 것) 세수를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만진 후 가장 먼저 한 일, 사람이 되어서 꼭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바로 청소였다. 그리고 둥실이가 “쓰레기를 치우고,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는 대목부터 갑자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뭔가. 이 고양이는. 죽음을 앞두고 고마운 이를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이 청소라니. 청소라니. 

 

청소란 자기를 일으키는 무수한 힘들과 뒤섞이며, 꼭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될 많은 가능성 속에서 자기 삶의 윤리 하나를 떠올려 보는 일입니다. 나 때문에 살아 주고 나 때문에 죽어 주는 것들에게 인사하는 일입니다. 청소는 그래서 힘들지만, 바로 그 순간이 내 인생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되지요. 식사와 마찬가지로 뒷정리에도 관계의 철학이 필요합니다. 삶이란 관계가 전부인 것입니다.(오선민, 『신화의 식탁 위로』, 북드라망, 2023, 300쪽)

 

“청소란 무질서에서 질서로, 즉 또 다른 관계 변형을 탐색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오선민 샘은 같은 책에서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센의 태도를 통해 청소의 윤리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청소의 첫번째 근본은 “돕는 마음”, 두번째는 인사하는 “공손한 마음”, 세번째는 “긍정하는 마음”이라고.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할 때 나는 종종 수행을 떠올린다. 이것이 일상의 수행이구나. 지금 깨끗해진 공간은 곧 더러워질 것이고, 지금 깨끗한 빨래는 또 땀과 먼지에 절 것이고, 지금 깨끗해진 그릇은 곧 음식물이 여기저기 묻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쓸고 빨고 닦아야 한다. 그래야 먹고 입고 자고 활동하는 내 일상이 가능하니까. 어떤 날은 정말 하기 싫지만, 이걸 하지 못하면 나는 일상을 꾸리지 못하게 된다. 방에는 먼지가 가득하고 물건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고, 개수대에는 그릇이 잔뜩 쌓여 있고, 빨래바구니에는 쉰내가 나도록 빨래가 넘쳐나는데, 거기에 일상이 있을 수 있을까.   

 


오늘도 생활 속 광고들은 설거지는 기계에 맡기라고, 빨래는 집앞에 배달해주는 서비스에 맡기라고, 일주일에 한 번 가정관리사 방문을 받아보면 어떻겠냐고 권한다. 그 시간에 당신은 좀더 창의적인 일이나 휴식을 취하라며 말이다. 이미 생활 속 많은 부분을 기계에, 타인에 맡기고 살고 있다. 하나쯤 더한들 어떠랴, 싶기도 하다. 하지만 깨끗한 걸 쓸 줄만 알고 치우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될까. 청소에만 그럴까. 게다가 그것은 모두 돈을 지불하고 얻은 것들이다. 삶에서 남이 내게 베푸는 것들이 (돈을 지불하면) 뭐든 당연해지는 마음에 어떤 행동들이 나오게 될까.

청소는 공간을 깨끗하게 하는 데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청소는 인사하는 일”이다. 돕는 마음과 공손한 마음으로. 이것은 “나 때문에 살아 주고 나 때문에 죽어 주는 것들”에 인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인사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마음과 몸의 안녕을 묻는. 그리고 최고의 감사인사이기도 할 것이다. 나와 나를 살게 하는 존재들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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