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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16

나는 왜 아픈가, '몸에 대한 무지'에서 '앎에 대한 열정'으로! 하루 종일 비가 오던 날, 의 오창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저녁을 먹고,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데이트 코스인 삼청동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다보니 “완전 데이트 코스네요~”라며 함께 웃었습니다. 처음 궁금했던 것은 오창희 선생님이 이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었을 예전 일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래 전 힘들었던 시절의 글을 시간이 흐른 후 읽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그 시절 일기를 다시 읽었을 때 꼬박 하루를 앓았어요. 잊고 있었던 그때의 통증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거든요. 몸 안 어딘가 저장되어 있다가 일기를 읽으면서 다시 환기된 것 같아요. 최근에는 손목이 많이 아팠는데, 왜 이렇게 아플까 생각해보니 4~5년 전만 해도 늘 아파서 케토톱을.. 2013. 6. 21.
[아파서 살았다 최종편] 오랜 고통과 불안을 '만나다, 철학하다' ‘경험’에서 ‘지성’으로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부처님을 따르던 무수한 제자들과 공자의 문도 3천 명을 위시하여, 주자의 강학원을 찾았던 2천 명의 학인들, 양명의 뜰에 모여든 개성 넘치는 문사들. 비단 이들 대가들만 그랬던 건 아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문사가 있었고, 그곳엔 가르침을 받기 위해 천 리를 마다않고 오는 학인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했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것이다. ─고미숙,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6,.. 2013. 6. 14.
스물두 살, 내 삶을 바꾼 '아픔'을 만나다 금요일에 새로운 연재가 시작됩니다. 라는 코너입니다. '아팠기에' 살 수 있다는 말, 조금 이상하지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병'을 없애야 할 무엇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요?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서 고미숙 선생님은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의 마디를 넘어가는 과정"으로 병을, 고통을 '앎의 의지'로 전환시키면 누구나 '자기 몸의 연구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병도 없을지 모릅니다(물론 동일한 병명은 있습니다;;). 누구와 만나 어떤 화학작용을 하느냐에 따라 말이지요. 그래서 이 코너에서는 '자기 몸의 연구자'가 된 '아파서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2013. 5. 24.
나는 왜 이 책에 끌렸을까? -2주간 읽은 책 이야기 어느 2주간 내가 떠들쳐 본 책들 한 사람이 책을 사는 데에는 일, 감정, 사람, 사물, 사건, 활동 등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연이 중첩되어 있다. 어떤 책을 선택하고 구입하고 그리고 그것을 직접 손에 들고 읽기까지의 과정에 놓인 인연과 시간은, 가만 생각해 보면 꽤 여러 겹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당장의 분명한 목적, 이를테면 수업이나 세미나 교재 같은 그런 목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떤 사소한 일에든 얽혀 있는 사연을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2주마다 이곳에서, 내가 구입하거나 선물받았던 책들 가운데 그 기간에 떠들쳐 보기라도 한 책 중에서 몇 권을 골라 왜 그 책을 샀고, 읽게 되었는지(책 좀 사본 사람이라면 산 책과 읽은 책이 동일하지 않다는 걸 잘 알 것이다)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 2013.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