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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2주간 떠들쳐 본 책들

나는 왜 이 책에 끌렸을까? -2주간 읽은 책 이야기

by 북드라망 2013. 2. 15.

어느 2주간 내가 떠들쳐 본 책들



한 사람이 책을 사는 데에는 일, 감정, 사람, 사물, 사건, 활동 등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연이 중첩되어 있다. 어떤 책을 선택하고 구입하고 그리고 그것을 직접 손에 들고 읽기까지의 과정에 놓인 인연과 시간은, 가만 생각해 보면 꽤 여러 겹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당장의 분명한 목적, 이를테면 수업이나 세미나 교재 같은 그런 목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떤 사소한 일에든 얽혀 있는 사연을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2주마다 이곳에서, 내가 구입하거나 선물받았던 책들 가운데 그 기간에 떠들쳐 보기라도 한 책 중에서 몇 권을 골라 왜 그 책을 샀고, 읽게 되었는지(책 좀 사본 사람이라면 산 책과 읽은 책이 동일하지 않다는 걸 잘 알 것이다)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풀어놓으려 한다(사실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지만, 그들에게 이곳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좀 써주십사 부탁할 순 없으니, 어쨌든 나부터 시작해 보자는 느낌 같은 거라고나 할까).


따라서 이 책 소개에는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책을 둘러싼 다른 이야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도 책 소개일 수 있는 걸까? 책 내용이 궁금한 분들은 직접 떠들쳐 보시는 게 제일 좋겠지만^^;; 시식코너 같은 기분으로 이야기들 끝에 그 책에서 기억에 남는 한 구절을 덧붙인다.(오늘은 첫 소개이기 때문에 대략 1월 한 달간 내가 전부 혹은 일부를 읽은 책들 가운데 골랐다.) 








이 책을 만나고 읽은 건 지난 연말이었다.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라는 선배(이자 필자 선생님인^^;;)의 권유를 받은 후 바로 구입했고(그 선배의 책에 대한 안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에), 구입한 날로 떠들쳐 보았고, 떠들쳐 보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아 읽게 되었고,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던, 문체부터 내용까지 대단한 흡입력을 가진 책이다.


읽자마자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몇 권을 더 구입하기도 했다(직접 사서 권하게 만드는, 이런 힘을 가진 책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188쪽)이라고 말하는 이 책 덕분에, 최근 겪은 개인적인 일로 인해 ‘읽는다는 것’에 대해, 또 ‘쓴다는 것’에 대해 든 깊은 ‘회의’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멜라 출신 농민의 아들[마르틴 루터]이 책을 읽습니다. 성서 박사가 됩니다. 그리고 책을 씁니다. 그래서 ‘교황의 방해자’가 되고 그리하여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대혁명은 성취되었습니다. 반복합니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책을 읽었습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도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던 거지요.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문득 떠올랐으므로 갑자기 말하겠습니다. 작가 고토 메이세이가 “왜 소설을 쓰는가?”라고 자문하고는 “소설을 읽어버렸으니까”라고,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 특유의 넉살 좋고 이상한 느낌으로 답했습니다. 이는 사실 똑같은 일입니다. 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는 것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고독한 싸움일지라도, 그륀베델 같은 광기의 위험이 있더라도, 책을 읽는다는 것을 그 정도까지 예민하게 생각하면,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 혁명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104~105쪽)





대학 때는 세미나나 교재 등 꼭 필요한 책을 사기에도 용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소설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을 해서 읽었다. “여기에 있는 소설들을 다 읽어버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서가를 순례하다 눈에 띄었던 것이 ‘이상문학상 작품집’이었다. 대출해서 읽은 이상문학상 첫해(1977년) 당선집(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내처 그해의 작품집까지 며칠 안 걸려 모두 읽어 갔다.


그리고 그 다음 해부터는 매년 나오는 작품집을 구입해 소장했다. 심지어 2~3년간 소설을 끊었던 때도 이 작품집만은 샀고, 10년 전쯤부터는 작품집 자체에 시들해졌지만, 그래도 어쩐지, 매년 새해가 되면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계속해서 구입했고, 올해도 그랬다. 시들해질 무렵 이 작품집에 수상작가의 ‘문학적 자서전’이 실리기 시작했는데, 수록 소설들보다 이 ‘자서전’과 ‘작가론’을 읽는 것이 재미있는 경우가 더 많다. 지금 내 책장에 꽂힌 이상문학상 작품집의 권수가 스물예닐곱 정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짐작하실 수 있듯이, 이쯤 모아놓다 보면 그 뒤는 번호 빠지는 게 왠지 신경 쓰이게 된다. ;;;


애란이는 소설 쓰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사람에 대해서건 세계에 대해서건 섣부른 법이 없어, 단정 짓고 확언하기보다는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추측하고 짐작하는 일이 많다. “소설을 써서 좋을 때가 있는데, 종교를 갖지 않았어도 세상과 사람에 대해 경외심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 있어서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쓰는 일은 결국 최선을 다해 세상과 사람을 짐작하려는 어떤 ‘태도’라고 생각한다.


─편혜영, 「작가론-작가가 본 작가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침묵의 미래-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82쪽





직업상 인터넷서점에서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새로 나온 책’들을 각 분야별로 쭉 일별한다. 그러던 중 눈에 띈 책이었다. 2001년에 나왔다 절판된 책인데, 2012년에 출판사가 바뀌어서 다시 출간되었다.


구입할 당시에는 뭔가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을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밤 동안 쭉 잠들지 못하고 몇 번씩 깨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나지 않고 있었을 때였다. 원인을 아는데, 해결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바꾸는 것 외에는. 그래서 다른 때 같았으면 일에 필요한 참고자료가 아니면 잘 사게 되지 않는 분야의 책을 선뜻 구입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사놓고는 어쩐지 보고 싶지가 않아서 책장에 꽂은 채 잊고 있다가, 불면증이 다시 찾아들자 생각이 나서 꺼내 보게 되었다.


세 번째 약속은 ‘추측하지 마라’이다.
사람들은 흔히 모든 것에 대해 추측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추측한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것이 정말이라고 맹세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추측하면서 그것을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그들을 비난하고 그들에게 감정적인 독설을 퍼붓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측할 때마다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추측하고 오해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다가 결국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우리가 살면서 겪어온 모든 슬픔과 문제는 어떤 일에 대해서 추측하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되었다. ……

단지 어떤 일에 대해 추측하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많은 감정의 독이 쌓인다. 험담은 대개 추측한 내용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옥의 꿈속에서는 험담하는 것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자 서로에게 독을 퍼뜨리는 방식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사람들은 분명하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기가 두려워서 추측을 하고 또 그 추측이 맞다고 믿는다. 그런 다음 자신의 추측이 옳다는 것을 옹호하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틀린 것으로 만드느라 애를 쓴다. 제멋대로 추측하기보다는 명쾌하게 질문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태도다. 추측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84~85쪽)





이 오글거리는 제목의 책은 1983년에 출간되었던 하루키의 초기 단편집이다(일본에서 출간된 제목은 『캥거루 날씨』라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는 순전히 내가 처음 읽었던 하루키의 단편이 이 소설집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목은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 20대 초반 때, 친구가 자기네 학교 도서관에서 직접 대출해 와서 나에게 읽어 보라고 건넨 책 제목이었다. 당시 친구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에게 푹 빠져 있다면서, 이 책은 그의 단편집인데, 특히 표제작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 너무 좋다고, 너도 꼭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소설은 친구 말대로였다. 치즈 케이크 조각 모양을 한, 그러니까 철로변 부채꼴로 생긴 기이한 집에서 신혼을 시작한 부부의 이야기는, 당시 ‘가난’하면 자동연관검색어로 떠오르는 ‘궁상’따위는 찾아 볼 수 없이 쿨하고, 또, 아름다웠다. 그 단편집 이후 당시까지 번역되어 있는 하루키의 작품들(『상실의 시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둘러싼 모험』 등)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쿨함’이 더 이상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고, 비슷비슷한 반복이라는 느낌이 들 때 즈음 하루키 읽기를 그만두었다. 다시 하루키를 읽은 것은 2011년에 번역된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때문이었다. 단골 인터넷서점에서 눈에 띄었고, “하루키? 잡문?” 하는 마음으로 구입한 책은 잠잘 때마다 조금씩 읽기 좋게 여러 편의 글들이 실려 있었고, ‘쿨’하기보다 ‘따뜻’한 느낌이 더 들어서 편안했다. 전처럼 열광적이진 않았지만 담담하게 좋았다. 하루키는 20대의 작가(20대 감성의 작가, 혹은 20대에 읽어야 제대로 느껴지는 작가), 라고 혼자서 오래 가져왔던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그냥 머물러 있지 않고 바뀌어 왔는데, 다른 사람만 그 시간 동안 내내 멈춰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이사는 친구의 라이트밴 한 대로도 충분했다. 이부자리와 옷가지, 식기, 전기스탠드, 몇 권의 책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 그것이 우리의 전 재산이었다. 라디오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었다. 세탁기, 냉장고, 식탁, 가스스토브, 전화, 물 끓이는 주전자, 진공청소기, 토스터 무엇하나 없었다. 우리는 그만큼 가난했다. 그래서 이사라고 해봤자 겨우 삼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인생은 지극히 간단해진다.


이사를 거들어주던 친구는, 두 선로 사이에 끼인 우리의 새 거주지를 보고 꽤 놀란 듯했다. 그는 이사를 끝낸 다음에 내쪽을 향해 뭔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급행열차가 지나갔기 때문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말했어?”
“정말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하고 감탄한 듯이 그는 말했다. (163쪽)




이 책을 구입한 건, 에세이집이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위화’라는 작가의 글을 한번 읽어 보고 싶기는 했지만, 어쩐지 소설을 읽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열 개의 단어에 ‘독서’와 ‘루쉰’이 들어가 있는 점이 사볼 만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했고, 전철을 타고 오가며 읽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읽었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죽음은 서늘한 밤이다"라는 하이네의 시구를 읽게 되었다. 그러자 오래전에 사라진 유년의 기억이 내 전율하는 마음속에서 순간적으로 되살아났다.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맑고 뚜렷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 기억이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만일 문학에 정말로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그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힘 말이다. 하이네가 쓴 시가 바로 내가 유년 시절 영안실에서 낮잠을 잘 때의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독서」, 108~109쪽





실천문학의 시선은 ‘문지’는 물론이고, ‘창비’보다 훨씬 더 현실참여적인 시집들로 출발했었다. 80년대에 ‘문학의 실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던 곳에서 낸 시집들이니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그럼에도 실천시선, 하면 내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옥중시선집이나 저항시선집이 아니라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다. 이 시집이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때까지 내 기억으로 우리 엄마는 자신이 볼 ‘책’을 산 적이 없으셨고, 신문 외에는 뭘 읽지도 않는 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안방에 시집이 한 권 놓여 있었고, 그것은 엄마가 직접 산 『접시꽃당신』이었다! 놀라움도 잠시, 역시나 시집은 며칠 못 가서 장롱 옆에 처박혀 있었고, 나는 그것을 꺼내와 내 책꽂이에 꽂았다.


그 다음 내가 만난 실천시선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로 시작되는 표제시로 인기가 높았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였고, 몇몇 저항시선집을 보았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실천시선의 시집들은 눈에서 멀어졌다. 최근에 다시 보게 된 건 손택수의 『나무의 수사학』(실천시선 185호)부터였다. 『녹색평론』에 실린 손택수의 시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이 인상적이어서 내처 그의 시집까지 찾아보고 구입하게 되었던 것. 그렇게 다시 관심권에 들어온 실천시선의 200호 기념 시선집이 출간된 걸 본 순간, 손가락은 장바구니 버튼을 클릭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네

      박철

가고 올 것이다
우리가 흔들려 마음의 수를 놓으니
세상의 온갖 즐거움
아이들의 아우성조차도
가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정작 우리가 내리지 못한 이 여행길
기차는 떠나고 비좁은 완행열차에
울다 지친 아이의 곁에서
눈물로 맹세하지만
후루룩 우동을 말아 먹는 어느 간이역쯤에서
슬픔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빼앗지 못함을 알고
돌아와 다시 매달릴 것이다
그대의 손목을 잡을 것이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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