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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지금 만나러 갑니다

[공동체, 지금만나러갑니다] <인문공간 세종>: 끝도 없는 숙제의 길 위의 세 사람

by 북드라망 2023. 10. 23.

<인문공간 세종> :  끝도 없는 숙제의 길 위의 세 사람

 
어두운 밤하늘에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과 그 보름달에 닿기 위해 언덕길을 달려 오르는 호박마차. 인문공간 세종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그림이다. 호박마차는 야심한 밤 숙제를 싣고 떠난다. 그들을 비춰주는 달님은 인문공간 세종의 오선민 선생님이다. 학인들은 실제로 오선민 선생님을 ‘달님’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호박마차 학인들을 만나기 위해 세종시를 찾았다. 어느 작은 카페에서 시간을 떼우고 있는데, 순식간에 세 평 남짓한 공간이 시끌벅적해졌다. 네다섯 명의 손님이 들어와 앉을 자리를 찾는 중이었다. 안 쓰는 테이블을 내어드리니 일행 중 한 분이 머쓱해하며 감사하다는 말 뒤에 한마디를 더 보탰다. “우리 좀 많이 시끄러울 텐데^^” 
 
그 말에 고개를 다시 들어 쳐다보니, 이 사람들의 가방 크기가 심상치 않다.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커다란 백팩이 의자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혹시나 싶어 물었다. “이 건물에서 공부하는 분들이세요?” 화들짝 놀라시며 어찌 알았냐 물으시기에 가방 크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실은 가방보다 더 확실한 심증이 있었다. 그분들이 등장했을 때 공간이 요란해진 게 아니라 밝아졌다. 얼굴도 목소리도 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달’님과 함께하는 학인들이라 그런 모양이다.
 
인터뷰하기로 한 건 그분들 중 세 분, 강평옥 쌤(이하 강평), 풀떼기친구 쌤(이하 풀), 기헌 쌤이다. 세 분은 먼저 카페를 떠나셨고, 우리는 잠시 뒤 카페보다 더 환한 세종 공간에서 다시 조우했다.
 

왼쪽부터 풀쌤, 이기헌샘, 강평샘


<온라인에서 맞춰지는 읽고 쓰기의 리듬>

고은 오전에는 무슨 세미나가 있으셨던 거예요?
기헌 저희 『탐구생활』 잡지 만들잖아요. 컴퓨터로 편집하는 수업을 했어요. 너무 재밌는 게, 수업하는데 조금만 알려드려도 너무 좋아하세요. 평소에 힘들게 작업했던 걸 편리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강평 기헌 선생님이 컴퓨터 선생님이거든요. 휴일이어서 일정을 잡으면서 겸사겸사 앞에 그 일정을 넣게 됐어요. 인터뷰 끝나고는 우리끼리 밥 먹고 자고 갈 거예요. 1년에 두세 번 같이 자는 것 같아요.
기헌 저는 잔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요. 매번 밤에 갔죠.
진짜? 근데 거의 계속 같이 잔 것 같아.
기헌 밤늦게 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오니까요. (웃음) 오늘은 자려고요. 내일 아침 새벽에 아이들 학교 보내러 일찍 가기는 하지만요. 저희가 온라인으로 주로 만나고 화요일에 오프라인으로 만나도 다들 올라가셔야 되니까, 오늘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은 문탁네트워크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비중이 훨씬 높아서 상상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온라인 모임 꾸리는 건 어떠세요?
온라인이 에너지가 정말 많이 들어가요. 한 번 더 공지하고, 한 번 더 안내하고. 왜냐하면 만나서 눈 마주치는 게 안 되니까 전체 안내하고, 개별적으로 또 안내하고. 전체 안내할 때는 좀 참신한 단어를 써보려고 노력도 해. (웃음) 
강평 오프라인은 만나서 서로의 기운을 느끼잖아요. 오프라인은 시간하고 약속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정확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거는 어떻게 안 되는 것 같아요.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을 대신해서 약속과 마감일로 리듬을 맞춰가는 거거든요. 그러다가 오프라인으로 만나면 각별함이 더 있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온라인이 조건이지 제한은 아닌 것 같아요. 
소모임이라고, 세미나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모여서 리듬을 만드는 모임이 있어요. 기헌 쌤이 6시부터 7시까지 매일 낭송을 하는데, 그거를 1년 했어요. 저는 일단 6시에 눈을 뜰 수가 없어요. 그걸 1년 유지했다는 게 대단한 사건이죠.
기헌 이 아침 낭송 힘은 같이 하시는 선생님들이 다 직장인이시라는 거예요. 그분들은 선택의 여지가 이 시간밖에 없는 거예요. 지난달에 일본 북해도 답사 갔다 오고, 이번에는 명절이랑 맞물리고 해서 너무 많이 쉬었어요. 그렇게 한 열흘 쉬니까 선생님들이 주말에도 하자고. 아침이 붕 뜨는 게 너무 헛헛하다는 거예요. 1년씩 하다 보면 신체 리듬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주말 낭송을 또 만들었어요. 지난주에 출범했는데 너무 재밌어요. 그리고 선생님들한테 너무 고맙다는 생각도 들어요. 혼자 책 못 읽는데, 같이 읽어서 너무 좋다, 이런 생각도 들고요.
저희 밤글이(밤에 글쓰기)는 밤 10시에 모여서 바로 음소거 하고, 대신 화면은 켜놓고 각자 알아서 쓰고 10분 전에 간단히 이야기 나누고 헤어져요. 근데 정말 집중이 잘 되더라고요. 이게 시간을 잊어버려. 막 “시간이 다 됐어!” 불러요. 그래서 지금 다하면 소모임이 한 7개가 돌아가요. 세상에, 돈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강평 오천 원, 만 원인데? 
떼돈을 벌겠다. 이벤트 많이 해야겠다.
모두 (웃음)
 

 

<나는 쓰는 사람>

고은 올해 열린 북드라망의 ‘한뼘 리뷰대회’에는 모두 참가하셨어요?
강평 네, 그리고 다 떨어졌어요. 탈락 후기를 썼죠. 처음에는 참가 후기를 써달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얘기했을 때만 해도 다 떨어질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반장이었거든요. 10명이 참석하니까 그중 한 명은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모조리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탈락 후기가 됐죠. 
고은 그래도 후기에서는 꾸준히, 계속 쓰시겠다고 하신 걸 봤어요.
강평 그렇죠. 그거[입상 여부]와는 상관없죠. 그냥 쓰는 사람인데요.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니까 그냥 쓴다!
강평 연연은 하는데 쓰기는 쓰는 거죠. (웃음) 그건 상관없죠.
고은 ‘나는 쓰는 사람이다’ 같은 감각이 있으세요?
‘나는 쓰는 사람이다’, 아 벅찬 느낌이 드네요.
강평 울지 말고 얘기해 봐요.
아니(웃음), 워낙에 쓸 거리가 많아요. 후기도 써야 되고, 댓글도 써야 되고, 숙제도 하고, 탐구생활 글도 쓰고, 페이스북에도 써야 되고, 톡방에 공지도 써야 하고, 우리 모든 일상이 다 쓰기네.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쓰는 사람’ 이런 정체성이 있다기보단 하다 보니, 쓰다 보니 너무 많이 쓰고 있더라.
고은 기헌 쌤은요?
기헌 글 쓰는 줄 모르고 여기 왔다가 글을 쓰라고 해서 쓰는데 너무 좌절이었어요. 글을 쓰다 보면 저를 만나는 게 부끄럽다고 해야 되나? 그런 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근데 계속하다 보니까 그런 저를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여기서 활동을 하다 보니까 친구들을 잘 못 만나잖아요. 가끔 만나면 제 표현이나 말이 되게 많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세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이 들 때도 많은데, 이 길에 계속 있다 보니까 글 쓰면서 제가 계속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고은 숙제는 어떤 거예요?
강평 보통 책을 읽으면 돌아가면서 발제를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발제가 없이 다 숙제를 하니까 노는 사람이 없죠. 회사에서 무슨 얘기 하면 제가 숙제, 숙제하니까 사람들이 직장인인데 무슨 숙제를 하냐고. 
기헌 모든 세미나에 숙제가 있어요. 저희 애들도 숙제에 관해서 물어봐요. 엄마, 오늘은 세미나 없어? 엄마, 오늘은 숙제 없어? 그러면 제가 있지, 늘 있지. 없을 수가 없지. 없는 날이 이상한 날이지. 그래요. 일상이 숙제입니다.
고은 숙제로 합평도 하세요?
강평 잡지 같은 데 실리는 건 적어도 두세 번은 고쳐서 올라가니까요. 세미나 글에 대해 합평도 하지만 달님이 은근과 끈기로 첨삭을 많이 해주세요.
달님이 단어 하나를 살리려고 정성스럽게 해주시는데 감동적이었어요. 좋은 글, 나쁜 글이 없구나. 위대한 고쳐 쓰기만 있다는 걸 정말 많이 느껴요.
기헌 놀랐던 게, 저는 글을 써본 적이 없으니까 제 생각에는 못 쓴 것 같은데 달님이 그거를 살려주시는 거예요. 그 안에서 할 말을 찾으시면서 “고쳐라”, “틀렸다”가 아니라 “이렇게 쓰려면 그걸 논증해라”이 방법을 알려주세요. 아니라고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예요. 글쓰기 스타일이나 실수가 잘 안 바뀌잖아요. 그러면 그걸 거듭해서 말씀을 해주시니까 좇아서 오게 됐어요. 선생님들하고 하는 얘기가 우리 달님은 ‘살리고 살리고’라고. (웃음)
 



<참 특이한 공부, 인류학>

고은 인류학 공부는 어떠세요?
강평 되게 재밌고 새로워요. 특히나 저는 현장에서 무엇이든 치환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진짜 환율처럼 생각했구나, 정말 많이 느끼게 됐어요. 어떤 거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잖아요. 서구인은 인디언을 보고 추상적인 말이 없다고 했지만, 그들은 나무 종류만 해도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잖아요. 그걸 구체화하고 구분할 수 있다는 건 다른 시각과 다른 관찰력이 필요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나무라고 할 수 없는 거죠, 완전히 다 다른 거니까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여기서 일 년 반 정도 선물을 주고받는 구매 팀장을 했어요. 제철 음식, 산지 음식을 구해서 보내고 또 선물 이야기도 썼죠. 저희는 받는 것만 적는 게 아니라 보내는 것도 적어요. 나눠주는 마음도 전달하면 좋겠다, 해서 같이 적게 됐죠. 근데 하면서 보면 보내는 것과 받는 것 중에 뭐가 더 많다고 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인디언들은 백인이 와서 얼마 주면서 팔찌 달라고 하면 황당하다는 거예요. 이 팔찌는 누구한테 받은 거라서 대체가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화폐로 환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선물 이야기를 쓰면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느끼게 돼서 좋았어요.
인류학에서 보면 다 절기, 때, 의례에 맞춰서 일상을 살더라고요. 이 변화에 맞춰서 인류가 어떻게 살려고 노력했는가, 이 전체 자연의 조화 안에서. 철학이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고민하는 거라면 인류학이 그걸 어떻게 살았나 실제 버전을 보여주니까 되게 재밌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 거지, 생각하게 되고요.
기헌 공부할수록 그때는 연결된 사고를 했던 것 같은데 오늘날은 뭔가 단절돼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읽으면서 이해가 안 가는 게 너무 많아요. 인류학 세미나에서 인류학 학문 자체를 공부하기도 하지만,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신경과 전문의의 병상 기록]나 『죽음의 수용소에서』[심리학자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회고 에세이]를 읽기도 했거든요. 어쩌면 인류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게 뭔지를 계속 탐구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달님이 인류학 공부가 답이 없는 공부라고 하시는데요. 근원을 탐구하면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게, 모험하듯이 간다는 게 되게 재밌어요.
풀 특이한 공부야. 타자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준다고 할까? 일상이 다 인류학으로 보여. 철학하고 같이 하면 좋다.
강평 갑자기 홍보를 하시나요? (웃음)
고은 이번에 일본으로 답사 다녀오신 건 어떠셨어요? 
기헌 진행팀은 6월부터 준비하셨어요. 8월에 일본에 갔다 와서 잡지를 최근에 마무리했으니까 거의 100일이 걸렸어요.
강평 처음에 동선과 프로그램 짜고, 사전 세미나를 한 달 가까이 하고, 일본에 4박 5일 갔다 와서, 글을 세 번 정도 고쳤으니까. 사전 세미나도 모여서 책 세 권 읽고 팀별로 진행했어요. 가기 전에 이미
여기 갈 수는 있나? (웃음) 그래도 다 가셨어요. 포기하신 분 한 분도 안 계셨어요.
기헌 막상 공부하고 가니까 다른 게 보이더라고요. 
 



공부하고 여행에 다녀온 이들은 무얼 볼 수 있게 되었을까? 그 내용은 곧 발간될 『탐구생활』에 실릴 예정이다. 인문공간 세종에서는 때가 되면 인류학 잡지인 『탐구생활』을 낸다. ’때‘란 대개 답사를 다녀온 뒤다. 지난 잡지에는 제주도로 다녀온 탐구 여행을 실었고, 이번엔 일본에 다녀온 이야기를 펴낸다. 함께 돈을 모아, 함께 글을 고치고, 함께 편집하는 네 번째 『탐구생활』이다.
 
강평쌤, 풀쌤, 기헌쌤은 인터뷰하는 내내 내게 환대의 마음을 보내셨다. 기헌쌤은 사시는 지역에서 난 맛있는 대추로, 풀쌤은 격렬한 리액션과 깊이 몰입해서 내어주신 답변으로, 강평쌤은 개그로. 특히 마지막에 강평쌤이 해주신 성대모사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대추와 리액션과 개그, 내가 인문공간 세종에서 만나고 온 또 다른 밝은 달빛이었다.
 
 

인터뷰_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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