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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결혼제도를 없애고 계약동거로! -『대동서』 만나기

by 북드라망 2012. 12. 26.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② 


『대동서』와 함께 읽기를 권함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말한다. “결혼제도를 없애고 계약동거로! 국가를 없애고 하나의 세상으로!” 결혼제도를 없애고 계약동거라니. 자유연애주의자 혹은 페미니스트의 발언이냐고? 아니다. 무려 100년 전의 이야기다. 그것도 어디 프랑스 파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까지만 해도 전족이 유행하던 중국에 살았던 사람의 생각이다. 결혼제도를 없애고 자유로운 계약동거로! 그것도 1년 남짓의 계약으로! 왜냐고? 너무 길면 싫증날 수도 있는데 기한을 길게 잡으면 억지로 같이 살아야 하니까. 또한 사람은 원래 누구나 새로운 상대를 바라기 마련이니까.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국가도 없애야 한단다. 국가가 있는 한 전쟁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개별 국가들을 없애고, 하나의 세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 유럽통합이 이루어지기 100년도 전에 이런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근대 민족국가 건설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대에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자니…. 이만하면 요즘 나오는 어떤 유토피아론보다 급진적이고, 구체적이고, 바람직한(?) 세계 아닐까. 이 사람이 누구냐고? 캉유웨이(康有爲)라는 사람이다. 처음 들어본다고? 무술변법의 주역이자, 량치차오(梁啓超)의 스승이라고 설명하면 좀 더 알 수 있을까? 중국사상사에서 공자나 노자를 제외하고 캉유웨이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도 없다. 사회개혁가로, 혹은 유토피아주의자로, 혹은 공자교(孔子敎)라는 종교 제창자로, 또는 고전 비판가나 수구적 보수주의자로…. 이거 한 사람 두고 말하는 거 맞아?


—김태진, 『고전 톡톡』, 89~90쪽


오늘은 『대동서』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주인공 캉유웨이는 위에 인용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 "결혼제도를 없애고 계약동거"를, "국가를 없애고 하나의 세상"을 만들기를 꿈꾸었던 중국의 사상가입니다. 요즘에 들어도 파격적(?)이고 급진적이라 할 수 있는 이 말이 무려 100년 전 중국에서 나왔다니,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계약동거, 하면 어떤 이들에게는 부정적인 단어로 느껴질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반대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자연(계절)이 봄-여름-가을-겨울-봄…으로 순환하고 변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생장소멸이 있습니다. 캉유웨이는 사람(사랑이라는 감정도) 또한 생장소멸을 겪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았습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러한 생장소멸을 '영원성'으로 묶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되는 지점이지요. 가족의 형태가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것처럼,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부분은 "현재와 같은 가족이라는 형태는 필연적인 것도, 유일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자기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족이 고통이 되는 것은 모든 가치가 가족이라는 집단으로'만' 회수되기 때문이다. 가족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자신의 가족'만'이 우선되는 순간이다. 이럴 때 그것은 다른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족쇄이자, 고통의 씨앗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가족 아니면 남이라는 논리! 그렇게 가족이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순간 캉유웨이가 말하는 끌림을 막는 것으로서의 경계가 되어 버린다.


─김태진, 『대동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62쪽





1. 『대동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대동서』의 친철한 안내서



사유를 지키기 위해 경계를 세운다기 보다 오히려 경계를 세움으로써 '빼앗겨서는 안 되는 내 것이 있다'는 발상이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적인 것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적이라는 틀을 만들어 버림으로써 사적인 것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공포 때문에 경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따라서 공포는 이러한 사적인 경계를 세움으로써 생겨나는 것이지, 사적인 것이 먼저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경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계에서 자유로울 때만이 이러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자기 것이라는 있지도 않은 허상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을 간직한 채 살 수밖에 없다.


─김태진, 『대동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78~79쪽




100여 년 전 중국의 한 지식인이 구상한 유토피아 이야기, 물론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낯설고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의 주장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왜 이 책을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이 책을 권합니다. 캉유웨이가 활약했던 시대 맥락 속에서, 그가 무엇때문에 계약결혼과 국가의 해체를 주장했는지 살펴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캉유웨이의 삶과 사상이 지금 우리의 삶과 어떻게 조우하는지,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2. 『대동서』, 캉유웨이의 원전 읽기


내 나이 스물일곱, 그 당시가 광서 갑신년이라. 프랑스 군대가 양성을 격동시키니, 나는 그들 군사들 때문에 서초산 북쪽 은당향의 칠회원 담여루에 피신하고 있으면서 국난을 슬퍼하고, 민생에 애통하여 『대동서』를 지어 백 년을 기리고자 할지니라.


—캉유웨이, 『대동서』, 10~11쪽

 


캉유웨이가 대동서의 서문을 완성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일곱, 당시 개혁을 둘러싼 피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캉유웨이가 활약했던 시기는 청나라 말기, 광무제에게 그의 개혁안 '변법자강책'이 발탁되어 무술변법을 통해 개혁안을 실행에 옮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당시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와 반대파들에 의해 개혁은 100일 만에 끝이 나고, 그는 망명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 부터 꿈꾸었던 캉유웨이의 유토피아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지, 직접 만나보시길!


 


3. 루쉰의 『무덤』


희망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감각을 예민하게 하여 더욱 절실하게 자신의 고통을 느끼도록 하고 영혼을 불러일으켜 자신의 썩은 시체를 목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허풍을 떨고 꿈을 꾸는 일은 오직 이러할 때에 위대해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령 길을 찾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래의 꿈은 필요하지 않으며, 단지 지금의 꿈이 필요합니다.


—루쉰, 『무덤』,「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대동세를 꿈꾸었던 캉유웨이, "희망도 절망도 없다"고 말하는 루쉰. 유사한 시기에 활동했던 두 사람의 작품을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캉유웨이의 정치적인 개혁의 열정과 루쉰이 말하는 개혁은 어떤 지점에서 공명할 수 있을까요? 특히 『무덤』에서는 루쉰이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아 쓴 글들, 또 중국 문화를 비판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루쉰은 청년 시절 일본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요, 청년 시절에 쓴 열정적인 글 속에서 낡은 것들과 결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포스트에서도 추천했던 『종횡무진 동양사』를 시대적 맥락이 궁금해질 때마다 함께 찾아보시면, 더욱 풍부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대동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부록에서도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소개했으니, 참고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그럼, 마음에 쏙 드는 책을 한 권 골라 함께 시작해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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