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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신화의 테마 - ① 불의 기원 식인의 불

by 북드라망 2022. 6. 13.

신화의 테마 - ① 불의 기원

식인의 불


신화, 밥상머리 교육담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신화 제작의 논리를 살펴보았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신화는 인간과 동물이 아직 구분되지 않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무슨 원자 단위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이 자연의 온갖 힘들로부터 출현하는 대등한 존재라는 것이 줄기차게 자각되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를 활발히 작동시키는 신화의 세계는 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주시하면서(卽非의 논리), ② 감각 기호를 통해 내가 세계와 접속하는 방식을 연구하며(구체성의 논리), ③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함께 조화를 이룰 것인가(전체성의 논리)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기호들을 배열한다고 합니다. 신화의 바다에서는 그러한 제작 논리에 바탕을 둔 몇 가지 주제들이 마치 섬처럼 솟아 올라와 있지요. 그러니 이번 회부터는 신화의 테마를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은 모두 4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권,『날것과 익힌 것 Le Cru et le cuit』(1964) 
    2권,『꿀에서 재로 Du miel aux cendres』(1966)
    3권,『식사예절의 기원 L'Origine des manières de table』(1968)
    4권,『벌거벗은 인간 L'Homme nu』(1971)

4권 『벌거벗은 인간』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는데요, 정말 기다려지시죠?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학을 1950년부터 구상했고요, 완간까지 파리 고등연구원 제5지부에서 했던 여러 번의 강의가 책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연구가 서서히 무르익을 때부터 71년까지 레비 스트로스는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 온 세상의 신화를 읽고 해석하는 마음의 모험을 했습니다.

 

『신화학』에는 남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전 세계 각종 신화가 다채롭게 망라되어 있는데요, 무려 813편이 분석되고 있다고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많은 신화를 어디서 구했을까요? 그는 마치 채집하듯이 했다고 합니다. 민속학 학술 논문, 외국의 각종 박물지 등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고 해요(『디디에 에리봉과의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198쪽) 저는 상상해봅니다. 어떤 장소에서건 어떤 사람들과든, 신화와 관련된 것을 포착하기 위해 고성능 레이더를 가동시키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손에 잡히는 대로 메모지를 들고 노트를 하는 레비 스트로스의 모습을요. 레비 스트로스는 그런 오후를 보낸 뒤 다음날 어김없이 신화 목록 카드를 다시 만들고, 이리저리 자료를 모으거나 훑어보면서 인간에 대해 생각했겠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4권의 출간을 마친 뒤 드디어 신화학 입문서가 쓰였다며 기뻐했습니다. 네? ‘입문’이라고요? 한국어로 번역된 신화학이 1권 650페이지, 2권 683페이지, 3권 772페이지에 이르고, 번역되지 않은 4권은 거의 1~3권에 맞먹는 분량이라고 하니까 실로 어마어마한 분석이 아닙니까? 호 @.@! 그러니 ‘입문’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신화의 바다는 어마어마하게 넓고 깊다! 아직도 읽히기를 기다리는 신화가 어딘가에 잔뜩 묻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 신화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온 세상 신화를 다 수집하고 싶었던 걸까요? 아마 아니겠지요. 책의 제목이 ‘신화학’이니 신화 생성의 논리 파악이 집필의 일차 목표였습니다. 그것을 ‘입문’이라 했다면, 이유는 신화 논리가 확정적일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개별 신화의 실질적이고 미학적인 효용을 드러내기보다는 신화들 사이의 간섭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각 신화를 향유했던 개별 인간들의 무의식적 공통성 같은 것을 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중앙 브라질의 신화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이들 인접 민족들의 신화들이 서로 일치하고, 서로 겹치고, 서로 화답하고 혹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한 민족의 신화를 분석해보면 다른 민족들의 신화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의미론적 전염병―이렇게 불러도 좋다면―은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점점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앞이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서면, 넓게 펼쳐진 경치가 또 다른 전망대에 이르도록 자극하고, 거기서 시선이 새로운 방향으로 펼쳐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앞의 책, 198~199쪽)

 

위의 인용문은 레비 스트로스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그가 보기에 지구별 위에서 태어나 사라지는 인간 하나하나는 마음속에 타인과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여러 가지 심상을 갖고 삽니다. 그들은 미묘하게 닮아 있는 신화를 나누고 살지요. 마치 의미론적인 전염병을 앓는 것처럼 말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의미론적 전염병의 규모가 엄청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신화학』에서 자주 감탄합니다. ‘아, 인간은 이런 문제까지도 고민했구나!’ 인류의 마음은 너무나 광대하여 온갖 질문, 온갖 답을 다 품을 수 있지요. 그러니 그런 고민이 담아가는 신화도 끝이 없고, 신화학도 완료를 모를 수밖에요. 레비 스트로스는 후대의 누군가가 신화학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신화학은 언제나 ‘입문’일 테니까요.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신화학』의 제목만 봐도 레비 스트로스가 신화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권과 4권의 제목은 같은 뜻입니다. ‘날것과 익힌 것’이란 자연과 문화를 대비하는 말이지요. 신화는 날임과 익힘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다시 말해 ‘과’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벌거벗은 인간’이라는 말도 참 재미있지요. 여기에는 ‘인간이 입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문화적이기만 한 존재라기보다는 벌거벗음과 입음 사이에 있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즉 인간도 ‘날것과 익힌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제목을 통해서 자연 상태에서 문화로 무엇을 어떻게 이전할 것인가가 신화의 큰 테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화학이란 문화 발생학인 것이지요.  

 

2권의 제목은 ‘꿀에서 재로’입니다. 꿀과 재는 공통점이 있지요, 꿀은 자연에서 벌이 발효시킨 물질로서 인간에 의한 가공처럼 자연에 의해 가공된 물질입니다. 가공되었다는 점에서 원료의 인위적 변용인데, 이는 인간이 자기 재주로 만들어낸 인공물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재는 나무를 태워 남기는 것인데요. 인간은 태움(가공)으로써 불의 사용으로 문화적 요소가 되었던 물질을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므로 꿀은 자연성의 문화적 변용을, 재는 문화성의 자연적 변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보기에 신화는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변용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였습니다. 문화 발생의 핵심 요소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용이다! 신화는 각자가 어떻게 자기를 바꾸어내는가가 문화와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라고 본 셈입니다.  

 

그런데 3권의 제목을 보지요. 식사예절의 기원입니다. 문화의 의미는 단지 ‘변용’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때의 변용은 자연과 인간이, 또한 인간과 인간이 관계맺는 형식이 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예의’라는 말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맺음에는 어떤 태도가 수반된다는 뜻이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를 한 마디로 밥상머리 교육담이라고 봅니다. 배추 한 포기가 김치가 되어 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어나는지를 보라. 그 김치를 누구와 나누어 먹는가를 보라.     
 


일 년 열두 달 불노리야~ 
『신화학』의 제목들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불이 두 번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익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불이요, 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불입니다. 신화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둔다고 할 때, 그 핵심 매개항은 불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약 400만 년~500만 년 전에 등장한 초기 인류는 채식을 했습니다. 180만 년 전 쯤 인류는 아프리카의 사막화 때문에 식물채집이 어려워지자 부득이 육식을 해야 했습니다. 이때가 호모 에렉투스의 시대이지요. 호모 에렉투스는 거대한 육식동물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진화압에 눌려 주요 부위만 빼고 몸의 털을 잃도록 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호랑이나 사자 표범 등 대형 육식동물들은 털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한낮의 태양볕 아래 체온 조절이 어려워, 한 마디로 말해 더워서, 그들은 주로 밤에 사냥을 하지요. 이런 동물들과 경쟁하기 어려웠던 호모 에렉투스는 낮 사냥으로 진로를 바꾸어 차라리 털을 없애자! 라는 방향으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차츰 털을 벗게 되면서 낮을 장악하게 된 인류는 부수 효과로 언어를 발달시키게 되기도 했는데요. 보통의 영장류들이 하루의 상당 부분을 가족과 친구들끼리 털 쓰다듬기로 보내는 것과 대비해보면 잘 드러납니다. 친족 사이의 감정적 유대와 공감을 위해 촉감을 발달시킬 수 없었던 호모 에렉투스는 혀를 놀리는 방향에서 교감의 기술을 발달시키기로 한 것이죠(새라 블래퍼 허디, 유지헌 옮김,『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이도스)의 제4장 독특한 발달과정 참고). 이렇게 육식에 입문하게 된 인류는 큰 짐승을 사냥하고 분배하기 위해 다양한 협력 기술을 계발해야 했고요, 잡은 동물을 먹기 위해 생태학적 지식을 쌓고 더욱 활용해야 했습니다. 불은 온기로 사람들을 모으고 열기로 고기를 익히게 해줌으로써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 세계적으로 불 축제가 현재까지 활발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제임스 프레이저는 유럽의 불축제 민속을 조사했는데요. 『황금가지』제63장에 아주 잘 정리되어 있지요. 프레이저는 1년 내내 유럽 도처에서 불축제가 벌어지는데 여기에는 큰 공통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대한 모닥불을 피우고 그것을 뛰어넘기도 하고요, 가축들을 불 속에 몰아넣거나 그 주위를 돌게 하는 일은 유럽 어디서나 볼 수 있다지요. 횃불을 들고 행렬을 지어 밭과 과수원과 목장, 외양간 주위를 도는 일도 있고요. 불붙은 원반을 하늘 높이 던진다든지 불타는 수레바퀴를 동산에서 아래로 굴리는 관습도 있다고 합니다. 프레이저는 불의례가 얻고자 하는 효과도 상당히 공통적이라고 지적하는데요, 모두 농작물과 사람의 건강과 다산을 기원하고 흉작이나 질병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레이저는 왜 하필 불인가? 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첫째는 만물을 생장시키는 태양의 힘을 모방하기 위해서, 둘째는 태양과 연관을 가지기보다는 단순한 정화의 의미로. 불은 실재적으로 보면 이글거리는 태양빛을 닮았고, 개념적으로 보면 태움이니 불순한 것을 없애는 식으로 물질의 본성을 바꾸지요.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저는 불 자체보다는 불 위를 뛰어넘는다거나 그 주위를 돌거나 불원반을 하늘로 올리거나 땅으로 굴리는 등의 행동들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왜 불 앞에서 멍하니 앉거나 눕지 않고 움직이는 걸까요, 사람들은? 물론 불은 늘 낼름거리니 그 움직임을 모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로 그 움직임이 인간의 모방욕을 자극했던 것알까요?  

 

 

 

넘어가고, 돌아가고, 오르고 내리고 하는 동작들은 정지해 있던 어떤 지점들 사이에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붙인 제목들을 염두에 둔다면 불은 변용입니다. 변용은 성질의 바꿈이니, 원래의 자리에 있던 그것은 다른 위치로 옮겨가게 되겠지요. 전기공학에서는 운동을 물체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공간적 위치를 바꾸는 일로 정의하기도 하지요. 불축제란 문명을 가져다준 그 에너지원에 감사를 표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 들어가면 만물이 서로 관계하면서 움직인다는 것을 강력하게 환기하기 위한 의례가 아니었을까요? 

 


불, 식인 문명을 이끌다
『신화학』1권도 불의 기원에 관한 신화로 시작됩니다. 보로로족에서부터 아피나이에족, 오페에족 등 제(Ge)족 언어를 쓰는 부족들에게서 발견되는 불의 기원 신화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요소들을 가장 잘 모아놓고 있는 아피나이에족 신화 M9를 바탕으로, 제가 불의 기원 신화가 다루는 장면의 세부를 번호 붙여 정리해보겠습니다. 

 

① 한 사람이 처남을 아라앵무새의 둥지 위로 올려보내 새끼를 잡아 오라고 했다. 앵무새가 맹렬하게 버티는 바람에 소년은 겁을 먹었고 매형은 화가 나서 사다리로 썼던 나무기둥을 치우고 가버렸다.
② 소년은 허기와 목마름으로 고통을 겪으며 바위 틈바구니에서 5일을 지냈고 마침내 새들이 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새똥으로 그를 덮었다.
③ 이때 표범이 지나가다 소년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 소년은 표범의 주의를 끌기 위해 침을 뱉었고 그때부터 대화가 시작되었다. 표범은 두 마리의 아라앵무새 새끼를 원했고 소년은 차례로 표범에게 그것을 던져 주었다. 표범은 소년을 잡아먹지 않기로 약속했고 물도 주고 했다.
④ 표범이 다시 놓아준 나무기둥을 타고 내려온 소년은 표범의 등을 타고 냇가로 가서 실컷 물을 마셨고 잠을 잤다. 표범은 주인공을 깨워 씻겨 주었고 그를 양자로 들였다.
⑤ 표범의 집에는 자토바나무 둥치 한쪽 끝이 불에 타고 있었는데, 그전까지 불을 본 적이 없던 소년은 그것이 집을 데우고 고기를 익힌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고 표범의 호의로 구운 고기를 먹고 다시 잠들었다.
⑥ 다음 날 표범은 사냥을 나갔고 표범의 아내는 소년을 구박했다. 돌아온 표범이 아내를 다그쳤지만 다음달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⑦ 표범은 소년에게 활과 화살을 주고 흰개미집을 과녁 삼아 활 쏘는 법까지 가르쳐 주며 포악한 여자를 죽이라고 했다. 소년은 양어머니를 죽였고, 표범은 그것을 인정하면서 소년에게 구운 고기를 가지고 마을로 돌아갈 길을 알려 주었다. 표범은 ‘너를 부르는 소리가 세 번 들릴 텐데 바위의 부름과 아로에이라 나무의 부름에는 답하되 ‘썩은 나무의 부드러운 부름’은 못 들은 채 지나가라’고 충고했다. 
⑧ 소년은 표범의 권고를 잊고 모든 부름에 답을 하고 말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의 생명이 단축됐다. 
⑨ 소년에게 또다른 부름이 들려왔고 그는 이에 대답했다. 그것은 식인귀 메갈론캄두레였고 여러 가지 변장을 할 수 있었기에 소년의 아버지로 변했지만 소년에게 정체를 들켰다. 소년은 식인귀와 싸웠으나 졌고, 식인귀는 소년을 채롱에 담아 자기 가족에게 데리고 갔다.
⑩ 가는 길에 식인귀는 코아티(coati: 남미 곰의 일종) 사냥을 위해 멈췄는데 소년이 코아티를 쫓기 전에 풀을 베어 길을 만들라고 했다. 소년은 채롱에 돌을 채워 넣고 자기가 먼저 이 길로 달아났다. 
⑪ 소년은 마을로 돌아와서 모험담을 이야기했고, 모든 인디언이 불을 찾아 떠났다. 자호새와 자쿠새가 이들을 도왔고, 맥은 커다란 장작을 날랐다. 
⑫ 마침내 표범이 나타나 ‘나는 이 아이의 양아버지요’라고 말하며 불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신화학1』, 196~197쪽)


불 한 송이를 얻기 위해 봄부터 소년은 그렇게 고생을! 흑! 정말 목숨을 몇 개나 걸고 얻는 것이 불입니다. 신화는 인간이 자체 개발해서 불을 익히는 기술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M9에서 애초에 불을 가진 것은 인간이 아니라 표범이라고 하지요. 자연 안에는 이미 불이 있었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없었을 뿐. 이처럼 신화 속 기술론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이미 있는 어떤 힘을 자기 식으로 갖고 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가져오기. 그것의 형식은 선물이어야 합니다. M9는 표범이 자기 아내를 희생해서라도 기쁘게 인간-아들의 가족을 위해 불을 주는 것으로 나옵니다. 문득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떠오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지요. 그래서 제우스로부터 바위에 묶여 간이 쪼이는 벌을 받았습니다. 아파나이에족도 제우스를 이해할 겁니다. 그들은 프로메테우스를 동정하지 않을 테지요. 선물받아야 할 것을 훔쳐왔으니까요. 

 

신화는 불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논합니다. 세상에 공짜 밥은 없으니. 소년은 먼저 표범에게 아라앵무새의 새끼를 선물했습니다. 이렇게 선물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오물을 뒤집어써야 했고요. 신화는 더러운 것 나쁜 것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으니 이런 문제에 대해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침뱉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침을 뱉음으로써 바닥에 물이 튀는 소리가 났을 것이고, 신화는 그 소리가 마치 언어처럼 표범의 주의를 촉구한다고 말합니다. 소년은 침을 뱉기 전에는 표범의 먹이였으나, 침을 뱉은 후에는 대화 상대가 됩니다. 침이 내는 소리는 언어여서 이제 둘은 뭔가를 주고 받는 대등한 존재로 서로에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새똥을 뒤집어쓰다’의 의미도 풀립니다. 아라앵무새에게 소년은 이제 자기 새끼를 훔치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주변 자연 정물과 같아 보이게 된 겁니다. 여기서도 신화의 기술론을 엿볼 수 있지요. 자연에서 뭔가를 가지고 오기 위해서는 자연의 무엇으로 자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멸의 거대한 힘 관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새똥을 뒤집어 쓴 소년은 인간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져 자연 속으로 쑤욱 들어가버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상태에서 침을 뱉음으로써, 소년은 다시 말하는 존재가 되어 인간계로 넘어오지요. 

 

표범은 자연일까요? 인간(문화)일까요? 표범은 인간보다 더한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부족민들은 모르는 불을 알고 있으니까요. 불은 소년의 친척들이 듣자마자 갖고 싶어한 위대한 물질문명입니다. 표범은 활과 화살도 갖고 있었죠. 신화는 이렇게 존재의 층위를 자연-인간-초인으로 위계적으로 나눕니다. 니체가 말하듯 여기서 인간은 하나의 사다리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화는 이 사다리를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자고 하지는 않습니다. 표범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수 있기 위해 소년은 한번 자연 깊숙이 들어갔다 나와야 하니까요. 포함관계로 보면 자연이 압도적으로 크고 깊습니다. 그 심층에 들어갔다 나오는 자는 인간을 초월해 갈 수 있습니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표범에게 아라앵무새의 새끼를 선물하고 소년은 금방 표범의 자식이 됩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다 누리게 되지요. 단물과 부드러운 고기에 쾌적한 가옥까지. 하지만 불의 기원 신화는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소년은 양어머니를 살해해야 하고 그 자신도 식인귀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처합니다. 불을 얻는다는 것은 친족살해, 자기죽음과 같은 수준의 일로 설명됩니다. 

 

이 감수성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세 번의 응답 장면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돌과 나무의 부름에는 답하라, 그렇지만 썩은 나무의 부드러운 부름에는 답하지 마라! 앞에서 우리는 대화란 서로 동등해지는 일이라는 점을 짚었습니다. 응답할 수 있음이란 동등할 수 있음이고, 동등하다면 서로의 능력이 자연스럽게 이전될 수 있습니다. 불을 얻게 된 소년은 돌과 나무와 대등해질 수 있었지요. 이제 돌이라고 하는 기술문명도 잘 쓸 수 있게 되고 나무라고 하는 에너지원(땔감)도 마구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썩은 나무의 부름에는 답하지 말아야 할까요? 이 충고는 표범이 주는 것입니다. 표범의 입장에서 보면 썩은 나무란 나무이기를 그친 것 즉 죽음입니다. 기술과 에너지를 한 손에 다 쥐게 된 인간은 이제 영생을 꿈꿀 수도 있죠, 만약 그가 썩은 나무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소년은 응답합니다. 그것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어요. 소년의 응답 덕분에 인간은 이제 단명(短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현대 의학은 필멸을 인간의 숙명적 불행이라고 하고, 현대 기술은 ‘생명연장의 꿈’을 내세워 죽음을 경시합니다. 그런데 신화는 표범으로부터 불을 선물받는 과정에서 소년이 썩은 나무의 부름에 응답을 했다고 확실히 밝히고 갑니다. 썩은 나무의 부름에 응답했기에 단명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불을 선물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지요. 여기에는 자연을 편의대로 변용하는 것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가족이 죽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라는 신중한 윤리감각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의 변용은 감사를 동반한 예의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재미있는 신화가 또 하나 있어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M56. 오페에 신화가 소개하는 불의 기원입니다. 옛날에 표범의 어머니가 불의 주인이었습니다. 동물들이 불씨를 훔치자고 합의한 뒤 온갖 수를 다 썼지요. 표범 어머니를 잠재워 간지럽히고, 그때 근육의 힘이 빠진 틈을 노려 불을 빼앗자는 둥 별의별 계획이 다 나왔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코티아들쥐, 맥, 긴수염원숭이, 개 등등 모두 표범 어머니의 불같은 눈동자 앞에서 나가 떨어졌지요. 그때 굳이 이 일에 성공할 필요도 없는 프레아들쥐가 나섰습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불을 가지러 왔습니다.” 그리고 프레아들쥐는 불을 탈취해서는 목에 걸고 가버렸다고요(『신화학1』289~290쪽). 

 

프레아들쥐도 불을 훔치기는 하지요. 그런데 녀석은 인사를 합니다.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들 등교하는 것을 가끔 보게 되는 저는 이 프레아들쥐 신화를 알게 된 뒤로 인사하는 풍경에 뭉클 감동을 받습니다. 안녕하세요? 라는 말이 얼마나 다정하고 친절한지, 그러면서도 냉혹한 사태를 앞두고 나오는 말인지 아찔해집니다. 우리에게 서로는 남이지요. 각자 생존을 위해 힘을 주고받고 있는. 신화는 이 과정에서 내가 누리게 되는 복덕(福德)이 타인의 힘을 빼앗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내 피붙이의 힘을 빼앗는 일이라고 합니다(표범 어머니). 그것을 절실하게 이해한다면 미안해지지요. 또 상대가 나로부터 무엇을 앗아 간다고 해도, 그것은 그에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자각도 가질 수 있습니다. 신화는 인사야말로 먹고 먹히는 이 삶에서 서로를 변용시키기 위한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의 기원 신화는 단명의 기원과 곧장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불을 때려면 장작이 필요하지요, 장작을 얻으려면 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관찰에 따르면 중앙브라질 토착민들은 돌만으로는 나무를 찍어 넘길 수 없었을 거라고 합니다. 이들은 불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요, 나무 밑둥에 며칠 동안 불을 놓아 살아 있는 젖은 나무를 천천히 연소시킨 뒤 기초적인 도구로 찍어 넘긴다고 합니다. 잡은 고기를 익히기 위해서 먼저 살아 있는 나무를 죽여야 하는 거지요. 익힘은 살인의 연쇄를 부릅니다. 문두루쿠족에게는 마른 나무나 썩은 나무라는 구분이 없다고 하지요. 이들에게는 단지 살아 있는 나무만이 존재합니다. 죽으면 나무가 아니니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유로크(Yurok)족 이야기도 함께 언급합니다. 유로크족은 땔나무를 쓰기 위해서 살아 있는 나무를 자르는 법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철제 도끼가 유입되기 전 대부분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공유되었을 겁니다. 땔감은 서 있건 또는 쓰러져 있건 죽은 나무에서만 얻어야 했겠지요. 이 규칙을 어기는 것은 그들에게 명백히 식인 행위였습니다. 왜 식인이냐구요? 살아 있는 숲의 한 존재는 모두 나와 대화 가능합니다. 서로 대등하며 대화의 채널을 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숲의 모두는 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지평에서 동식물과 인간은 같은 종족이 됩니다. 앞에서 신화는 동식물과 인간이 구별되지 않는 시대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 전체, 숲을 나와 동족으로 보는 것이 신화의 퍼스펙티브입니다. 그러니 내 배를 불리기 위해 살아 있는 나무를 자른다면 그것은 식인 행위인 것입니다.  

 

물론 화전농업(écobauge)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나무를 태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그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감정을 가졌습니다. 팀비라 신화(M71)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요. 속에서 타고 있던 쓰러진 나무둥치 위를 걷던 한 인디언이 자신의 정원에서 실수로 불에 데었습니다. 상처는 치료될 수 없다는 판결이 났어요. 결국 호의적인 유령(자신의 조부모 유령)이 나타나 그를 겨우 살렸는데, 이때부터 주인공은 피로 더러워진 손으로 구운 고기를 먹음으로써 내장의 통증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속이 타고 있던 나무는 살해당한 나무이겠지요. 누군가의 땔감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의 없이 나무를 죽인 행위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되는데, 덕분에 주인공도 극심한 속병을 앓게 됩니다. 이것을 조부모 유령이 구한다고 하니 비극은 가족극(숲은 내 가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부모 영혼의 호의로 용서를 받게 된 주인공은 피로 더럽혀진 몸이 되어 내장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얻었어요. 피묻은 모습이니 그도 자기죽음을 겪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타지만 안으로는 치유되는 형상으로 새 삶을 살게 되는데요, 속이 타지만 겉은 멀쩡했던 나무둥치가 전도된 모습으로서였습니다.   

 

불이란 문화의 상징입니다. 야생의 신화는 ‘문화’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 비극을 놓치지 않습니다. 문화란 식인 행위이기도 하며, 그것을 보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식인된 자의 모습이 곧 자기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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