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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청년루크레티우스를만나다] 행복한 신들에 대하여

by 북드라망 2022. 6. 8.

행복한 신들에 대하여

 


어머니의 신앙, 나의 업
잠시 씁쓸하다가도 금방 사라지는 걸 보니, 역시 슬픔이 아니라 이게 맞나 틀리나 하는 도리적 의문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결혼식을 앞둔 형과 통화하다가 엄마 얘기가 나왔다. 엄마의 자리를 어떻게 할지, 연락을 해야 할지, 어떻게 보일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등의 문제를 감정 없이 이야기했다. 결코 가벼운 기분은 아니었지만, 심각해지지도 않았다. 드라이했다. 교회에 연락은 하되 안 오셔도 문제없다. 오시는 상황도 이상할 테고. 십삼 년을 왕래가 없었는데, 뭐. 이젠 내가 슬픔이라고 여겼던 감정이 다분히 관념적인 반응이었다는 걸 알겠다.

교회를 나오고 조금 지나서는 엄마를 생각하며 울기도 했다. 감정이 동한 것은 맞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주변 사람들의 말과 표정으로부터 내 상황이 결여이고 마땅히 불우한 일이라는 암시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모성애라고 할 만한 것을 알지 못했다. ‘엄마’라는 단어에 으레 따라붙는 애정이나 미움이나 책임감 같은 잉여적 정서는 내게 없었다. 그런 게 생기지 않는 환경이었다. 내가 살던 교회 공동체는 가족 개념이 혈연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 곳이었다. 또래들과 나는 ‘어린이집’이라는 건물에서 자랐다. 엄마는 교회 공동체 안의 여러 어른들 중 한 분이셨고 가끔씩 식당에서 마주칠 뿐이었다. 아빠는 일요 예배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 내가 느낀 슬픔이나 분노는 어떻게 보면 학습된 것이기도 하다. 가족이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 둘러보고 나서야 인위적으로 일으킨 감정 같은 것. 그래서 금방 식었다. 한때는 형과 의기투합하며 그 시골 교회의 부조리와 폭력을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데에 고발하자며 복수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역시 잠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순진한 꿈이 남았다.

불과 몇 년 전인 스무 살 무렵까지 내겐 대의가 있었다. 저 사이비 교회 부락에서 어머니를 구출해내야지! 저 어두침침한 곳에서 밝고 자유로운 사회로 나와, 음울한 하느님의 종이 아니라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게 해드리자! 어렵더라도 그게 좋은 일일 거다. 하지만 이런 포부도 여차저차 식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길이 있는 거니까. 세상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그런 전면적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고 계시니까. 그리고 가족도 학교도 나머지 모든 생도 내어놓은 그런 삶의 무게를 어떻게 이토록 작은 내가 감히 평가하겠는가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원망이었던 것이 동정으로 다시 일종의 경외로 바뀌고 나자, 이제 어머니를 거의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환갑 때도 잠깐 떠올려본 게 전부였다. 그 굽은 허리가 얼마나 더 내려갔을지 그려본 것으로 지나갔다. 아들의 결혼 소식은 어떠셨을까. 내가 결혼할 때도 전해 들으시려나. 어쩌면, 우리도 언젠가 당신의 부고를 ‘전해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어떨까. 이런 생각은 가슴을 시리게 하지만 길게 이어지진 않는다.

그러다가 최근 아주 우연한 계기로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 엄마한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느냐는 친구의 말이었다. 들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면서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뵈었던 때가 떠올랐다. 왜인지 그 장면을 짚어보다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띵했다.

열아홉 살 겨울, 대학을 붙고 나서 어머니를 찾아갔었다. 5년만이었다. 교회 건물들은 전보다 더 낡고 작아 보였고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같이 자란 친구들이 아이들을 업고 있던 모습, 빛바래고 어수선한 ‘어린이집’, 쇠진해 보이는 교회 어르신들. 어머니와 단둘이 짧은 대화를 나눴다. 바닥을 응시하는 습관이 있던 어머니의 얼굴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치고 있었다. 아마도 미안함, 반가움, 죄의식, 당혹감, 연민, 두려움, 희망, 절망 등이었으리라. 대화 내용은 거의 기억이 안 났지만, 단 한 마디는 선명했다. 내가 한 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만함으로 나는 말했다. “어머니가 믿는 신이 내가 아는 신보다 훨씬 작은 것 같아요.” 그때 어머니 얼굴에 스쳐 간 경직된 빛과 떨림이 기억난다. 한참 뒤에야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말씀이 더듬더듬 나왔던 것 같은데 흐릿하다.

 


어쩌면 이것이 내 인생 최대의 구업일지도 모른다. 대체 어쩌자고 그따위 말을 내뱉었던 걸까? 무슨 정신으로 나는 그런 짓을 했으며, 그것이 패륜적일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음을 7년이 더 흘러서야 알아차렸단 말인가? 내가 당신을 아나? 어떻게 그 말 못할 반세기의 신앙을, 그 포기와 순종의 대상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유로지비’ 같다. 느낌이 그렇다. 중학교 때, 친정 식구 전체의 반대를 뒤로하고 교회로 오신 이후로 지금까지 묵묵히 종처럼 사신 거다. 수줍고 자신 없는 표정과 늘 내리깐 시선. 굽은 허리, 둘러맨 앞치마. 그리고 웬만한 노가다의 손보다도 더 두껍고 투박한 손.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손과도 같은. 옷차림도 닮았다. 그런 몸과 그런 손으로 따르는 신을 대체 내가 뭐라고 무시했던가. 내가 안다는 더 큰 신은 또 뭐였는가? 뭐 없다. 자연법칙이나 객관성 같은 걸 생각했겠지. 정말 경멸스러운 것은 그 말을 할 때의 나의 태도였다. 그 몰염치함. 그 폭력성. 어쩌면 원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원망 말이다. 혹은 어린애의 치기 때문이었는지도, 아니면 어머니의 순진한 모습 앞에서 부풀어진 허영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어머니가 작다고 했으면 나았을걸. 나는 그렇게 돌아갔지만 어머니는 남아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올려야 했을까.

나는 이 실수를 뉘우친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거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지만 그건 분명한 잘못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오해하고 미련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어머니의 신과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거나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업을 감당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감상에 빠져 반성하거나 자책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내뱉은 그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생각 없이 뱉었던 그 말을 옹졸한 반항적 비난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 그 말을 지우는 게 아니라 살려내, 어머니의 신이 어떤 신인지, 왜 그 신이 작은지, 내가 ‘더 큰 신’이라고 했던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하나씩 대답해보는 거다. 그래서 내가 당신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고 그것이 당당함을 나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이 일을 루크레티우스의 도움을 받아서 시도해보자.


어머니의 신과 루크레티우스의 신
가장 단순한 질문부터 해보자. 어째서 우리는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신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서 우리를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을 지배할 권리도 줬다. 그리고 어겨서는 안 되는, 그러나 얼마든지 어길 수도 있는 ‘계명’을 주었다. 신은 좋은 시력으로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를 지켜보신다. 기뻐하거나 실망하거나, 분노하거나 용서하거나, 상을 주거나 벌을 줄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입맛 다시는 모습이 그려진다). 금지조항만 있는 건 아니다.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은 싫으셨는지 인센티브 제도도 허용되었다. 얼마나 창의적으로 복종하는지, 어느 정도의 극단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의 경계는 열려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까지 잡아 바쳤는데, 이것은 사천 년 동안이나 강조되고 있는 모범사례다. 자, 어디 한번 해봐라. 무슨 경연프로그램 심사위원마냥 팔짱을 끼고서 참가자가 있는 것 없는 것 다 뽑아 바칠 때까지 보고 계신 거다. 사랑의 눈빛으로. 얼마나 짓궂었으면 하나뿐인 아들 예수마저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하며 부르짖게 만들었을까. 천성적으로 심판하길 좋아하는 그 신은 인간이 어려운 재주를 부릴수록 기뻐하신다. 좀처럼 내어주기 어려워하는 혈육과 재산, 내밀한 욕망, 임종(순교) 등을 바치면 가산점을 챙겨 준다. 가족 통합 포인트가 있다면 나도 꽤 높을 텐데.

아, 어쩌면 이리도 ‘인간적’이란 말인가? 아무리 신인동형이라지만, 어떻게 창조자가 되어서 피조물이 소중히 여기는 걸 내어 받으면 좋아라 하고 거슬리는 일을 하면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얄짤없이 보복하고 있는가. 뭐가 부족하길래 모든 것을 바치게 하고 떨게 하며, 포기와 헌신과 침묵과 믿음을 요구하는가. 성내고 삐지고 질투하는 신이라니. 그것도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게! 사람들을 이끌 방법이 징벌과 보상뿐인 신이라니. “그런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자들을 기쁘게 할 생각에서 지옥이란 걸 만들어 냈던 것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426쪽) 이제 좀 알 것 같다. 예배시간에 신도들이 왜 그렇게 웃다가 울다가 박수치고 소리 지르는지를. 왜 그렇게 다른 종교인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흘겨보는지를. 보시기에 좋았던 거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거꾸로다.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신의 속성은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부여되고 추정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민족과 문화마다 신의 성격과 수준이 다르겠는가? 어머니의 신은 이스라엘 사막에서 시작해 로마와 중세 수도원, 종교개혁을 거쳐서, 20세기 남한 사회의 개신교 정서에 맞게 변형된 신이다. K-신앙이랄까. 어쨌든 기도도 한국어로 들으시고 헌금도 원화로 받으시니까.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관심받길 바라고, 수틀리면 권능을 이용해 고난에 빠뜨리는 과격한 애정결핍자로서 말이다. 우리가 화가 나면 소리치고 물건을 부수듯, 천둥이나 지진이나 전염병 같은 예기치 못한 불상사 또한 신의 분노일 거라는 상상.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듯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내어줘서 알맞게 달래줘야 한다는 추측. 망상과 억측이다.

이처럼 징벌과 보상을 즐기는 다혈질의 신을 만들어내는 경향은 고대에도 뿌리 깊어서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탄식했다. “오, 불쌍한 인간의 종족이여, 신들에게 그러한 일을 배정하고, 또 가혹한 분노를 덧붙였을 때, 그때 얼마나 큰 신음을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우리에게, 어떤 눈물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낳았던가!”(5:1195)

루크레티우스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종교와 사제들의 말이 낳는 “죄악에 찬 불경스런 행위들”(1:82)에서 출발한다. 아가멤논은, 바람이 불지 않아 그리스 연합군의 배를 띄울 수 없게 되자 딸을 제물로 바쳤다. 왜 그랬던가? 제물을 받은 신이 보상을 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신이 겨우 상거래나 하는 자란 말인가? 받으면 기뻐하고 못 받으면 토라지는? “이게 신이냐?” 루크레티우스는 묻는다. 대체 그런 옹졸함은 누가 부여한 것이냐고. 그건 전적으로 인간의, 그것도 나약한 인간의 모습 아니냐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그렇게 나약한 인간이 저지른 실수에 붉으락푸르락하는 존재가 여전히 신일 수 있느냐고. 신이 있다면 더 ‘신적’이어야 한다. 어린애 같은 신은 꺼져버려라. 어떤 것도 신을 흔들 수 없다. 어디에도 매일 수 없는 존재. 신은 무위하고 무사하다.

 

“왜냐하면 신들의 모든 본성은 자체로 최고의 평화 속에, 우리의 일들로부터 나뉘어 멀리 떠나 불멸의 세월을 즐기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본성은 모든 슬픔을 벗어난, 위험들을 벗어난, 스스로 자신의 풍요함으로써 권능을 지닌, 우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제물로써 환심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분노와 접촉하지도 않는 것이니까요.”(1:44-49)


루크레티우스의 신은 그 어떤 동요와도 관련이 없다. 그들은 아무런 결핍도 없고 근심도 없으며, 지극히 평온한 동료들과 더불어 살면서 자신들 고유의 완전성을 향유한다. 세상의 어떤 일도 그들의 평안함을 흔들 수 없다. 인간들이 경배하고 제사를 올리건 신을 등지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살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인간을 걱정하지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인간을 만들어 놓고 항시 주시하는 우리 주 하나님 여호와와는 전혀 다르다. 루크레티우스에게 신적인 권능은 홍수나 지진을 일으켜 혼내주는 데에 있지도, 세계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에 있지도 않다. 신들은 통치자나 군주가 아니며 창조자나 관리자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거주자다. 그들은 자연에 앞서거나 그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안에서, 스스로 가장 완벽한 풍요로움으로 거주하는 것이 그들의 권능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신들은 ‘축복받았으며 불멸하는 본성’을 가지고서, 그 스스로도 고통을 모르고 다른 것들에게 고통을 주지도 않으면서 존재한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자연 안에 존재한다는 말은 곧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은 곧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다. 신들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로 이뤄진 것이 어떻게 불멸할 수 있다는 것인가? 결합된 모든 것은 해체된다는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가? 물론 신들의 몸은 변한다. 하지만 마모되었던 부분은 다른 원자로 항상적으로 재공급되어 보충된다. 그렇지만 신들의 불멸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존재방식 혹은 거주방식과 관련된다. “신들의 권능과 그들의 평화로운 거처가 드러납니다. 그것들을 바람도 뒤흔들지 않으며, 구름도 빗줄기로 흩뿌리지 않고, 날카로운 서리로 얼어붙은 회색 눈도 떨어져 침범치 않고, 언젠나 구름 없는 대기가 덮고 있지요.”(3:20)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신들은 ‘간세계’(metakosmia)에 거한다. 간세계란 말 그대로 ‘사이 공간’이다. 저 멀리 있는 신들의 왕국이나 하늘나라 같은 곳이 아니다. 그런데 무엇의 사이라는 걸까? 루크레티우스는 세계가 허공과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데, 허공도 원자도 아닌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걸까? 참고할 자료가 거의 없는 ‘간세계’라는 개념을 놓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아주 복잡한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3차원 공간에 무수히 접혀있는 일종의 2차원의 면들로 묘사한다. 또 어떤 이는 신들의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다른 원자들과 섞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원자들의 끝없는 결합 해체 운동 속에서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상대적 빈 공간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 됐든, 요점은 신들의 세계가 우리가 경험하는 단단한 물체들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들의 원자는 다른 원자들에 타격을 받지도 타격을 가하지도 않는다. 하여, 그들은 어떤 동요도 없이 고요하다. 이것이 신들의 불멸이다.
  

신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루크레티우스가 묘사하는 신과 신을 이루는 원자는 물리학에서 발견한 기본 입자인 ‘중성미자’를 떠올리게 한다. 중성미자란 질량도 없고, 전하도 없고, 다른 어떤 물질과도 상호작용하지 않는 아주 작은 입자다. 너무나 작아서 마치 파리가 남대문을 통과하듯 지구를 그냥 지나가 버리며, 평균적으로 납 속을 상호 작용 없이 3,500광년 동안 통과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도 우리 몸을 그냥 지나가고 있지만, 그렇게 지나가 버리기에 볼 방법이 없다. 그럼 어떻게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을까? 처음에는 계산상으로만 존재가 예상되었던 중성미자는, 다행히도 백만분의 1정도 확률로 다른 입자에 충돌하거나 흡수되기 때문에 복잡하디 복잡하게 고안된 장치를 동원해 수년 간 실험한 끝에 흔적으로만 관측될 수 있었다.

간세계에 거주하는 신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유물론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개념(先-개념)을 가질 수 있다. 무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자들로 이뤄진 미세한 막을 허공으로 방사한다. 이 막이 바로 시뮬라크라인데, 그것에 의해 우리는 어떤 대상을 감각할 수 있다. 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원자는 다른 원자들과 쉽사리 접촉하지 않지만 일부는 우리 신체의 미세구멍을 통과해서 영혼의 원자들에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들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인식의 과정에서 우리의 경험과 믿음이 개입해 신에게 엉뚱한 속성을 덧붙일 뿐이다. “신들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우리의 앎이 분명하므로.”(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3절)

 


솔직히 신을 알기에 신이 있다는 말은 썩 와닿지는 않는다. 왜 굳이 신의 존재를 남겨둬야 했을까? 그는 인간이 두려워한 기이한 자연 현상들의 원인을 이치에 맞게 밝히고, 영혼과 정신의 메커니즘까지 원자들의 결합과 해체 운동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왜 이런 물질적 우주 사이에 관찰되지도 섞이지도 않는 영역을 따로 마련하면서까지 신들을 살려둬야 했을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불멸이라는 용어까지 쓰면서 말이다. 어차피 하는 일도 없는데, 자연학자답게 그냥 신 같은 건 없다고 해버리면 속 편하지 않았을까?

어떤 이들은 신을 부정했을 때 맞게 될 군중의 비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여한 에피쿠로스를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두려움과 싸우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사람들의 손가락질 따위가 무서워 신들을 남겨뒀을 리가 없다. 그랬다면 애초에 신들에게서 전지전능함을 떼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상하다. 사적인 기록이 없는 루크레티우스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은 신들을 기리는 행사에 가끔 참여했으며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첫머리부터 대뜸 비너스에 대한 찬미가 등장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들, 이 우주를 조직하지도 그렇다고 인간사에 관여하지도 않는 ‘게으른’ 신들의 존재를 긍정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경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왜?

그 대답은 바로 신들이 인간들에게 필수불가결한 행복의 모델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 행복의 이미지를 제공할 수 있는 ‘현재의 행복한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행복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마치 별이나 등불처럼 그저 밝은 모습으로, 신들은 그저 존재한다. 지극한 행복함으로. 어떤 것에도 동요되거나 망가지지 않고 세계를 거니는 평온함으로. 이런 신들이 존재함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할 때, 우리가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들과 유사하게 되고 싶다는 것. 우리에게 반복되는 이 슬픔과 두려움과 탐욕의 굴레를 벗어나 그들처럼 이 세계 안에서 여일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것.


신앙의 새로운 이미지
이제 나는 어머니의 신앙이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체험적 차원임을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한 의문은, 그 길고 고된 신앙생활이 왜 계속 두려운 것처럼 보이는 걸까 하는 점이다.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교회의 풍경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손뼉을 치는, 죄를 곱씹고 구원을 구걸하는 모습이었다. ‘부흥’으로 점철되고 ‘약속’으로 견인되는 신앙. 도대체가 공포나 체념이나 보상심리 없이 신을 따를 수는 없을까.

루크레티우스가 소개하는 독특한 신들로부터 나는 신앙의 새로운 이미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이 신들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강제성이나 호혜 관계도 없다. 즉 게으르고도 평온한 신들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도 감사할 필요도 없다. 우린 죄진 것도 빚진 것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을 찬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즉 그럴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가꾸고 닦아야 하는지 배우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지혜에 알맞다. 우리가 그것을 안 하면 신들이 화를 내서가 아니라, 능력과 탁월함에 있어서 뛰어난 본성들에 대해 우리가 숙고를 하기 때문이다.”(장 살렘, <고대 원자론>, 난장, 276쪽) 기도의 이유는 속죄도 아니고 애원도 아니고 타이르거나 진정시키기 위함도 아니다. 기도는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정확히는 우리가 그 탁월한 존재들에게서 닮고자 하는 지혜와 기쁨에 도달하기 위한 발심의 훈련이다. 이것은 불교도들의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수행자들은 자신의 스승에게 최고의 경의를 담아서 공양을 올리고 삼배를 드린 후 이렇게 발원한다. “당신이 성취한 깨달음을 저도 얻기를 서원합니다.”

교회를 나온 이후로 나는 신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무신론을 옹호한 것은 아니었으나 유일신이나 인격신을 믿는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런 냉소가 왠지 빈약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신을 버린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나는 그와 더불어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에 감사해야 하고 무엇을 존경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일까지 닫아버린 것은 아닐까? 신이 막고 있던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질문들을 외면해온 것이다. 그래서 종교에서 벗어난 자들이 결국 다시 모시는 것은 아주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들이다. 과학 상식이나 도덕, 경제적 합리성, 자기계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등. 남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 혹은 나의 왜소한 만족감으로 대충 막아놓고 더 이상 내 실존이나 세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왠지 낡고 유치해져 버렸다. 속이 텅 비어있는데도 말이다. 그런 오만함으로 나는 어머니께 망언을 했던 것이다. 어떤 것도 감당하거나 내어주지 못하면서.

루크레티우스를 공부한 지금, 다른 신앙을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어떤 두려움도 채무감도 섞여 있지 않고 오직 그것의 탁월함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행하는 그런 신앙 말이다. 칠 년이 지나긴 했지만, 신적인 것, 고귀한 것, 존경하고 따를 만한 것을 다시 정의해보고, 나 자신이 거기에 가까워지는 수련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글_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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