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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밑줄긋기

by 북드라망 2021. 12. 1.

이렇게 보면 무지야말로 만병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다는 건 바로 이 타고난 무지를 타파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무지를 벗어나려면 일단 생로병사가 무엇인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대 현대인은 질문을 잘 던지지 못합니다. 뭐가 문제인지, 뭘 모르는지 모르는 거죠. 무지로 인해 괴로운데, 무지가 괴로움의 원천이라는 걸 모르는 무지에 빠진 겁니다. 무지의 무지의 무지의 무지……. 이런 걸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지의 중층구조’라고 합니다. 이른바 무명이 그것입니다. 밝음이 전혀 없는 어둠의 세계인 거죠. (184쪽)


‘산다는 건 무지를 타파해 가는 과정’, ‘무지가 괴로움을 만든다’ 같은 말들을 들으면 ‘아차’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딘지 모르게 희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그 간단한 원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고 두 번째는 ‘무지’가 문제라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당신도, 그 누구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생은 부자든 권력자든 가난뱅이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일정정도 이상의 괴로움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평등하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괴로움’의 해결방법도 평등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애써 알려고’ 노력 중입니다. 


불교의 연기법은 직접원인과 간접원인을 폭넓게 보는데요. 그걸 인생에 적용해 보죠. 가령 누군가 '나는 왜 이렇게 불향한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이게 결과입니다. 그럼 원인을 찾아야겠죠. 가난해서, 부모를 잘못 만나서, 직장 상사가 괴롭혀서, 등등의 원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연기조건으로 가면 '마음에 늘 불행을 만들어 내는 구조가 있어서'라는 원인도 나오는 겁니다. 매사를 불행으로 해석하는 패턴이 당신에게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럼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내가 언제 그랬냐고 버럭! 화를 내겠죠. 아니라고, 내가 그 인간만 안 만났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부모가 나를 제대로 케어만 해줬어도 이러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죠. 그럼 이렇게 반문할 수 있어요. 유복하게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는데도 왜 그런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 속출하는 걸까요? 또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 내가 불행해졌다'는 논리가 타당하려면 미모의 선남선녀들은 무조건 행복해야겠죠? 그런데, 아니잖아요. 또 요즘엔 돈이 행운의 척도인데, 그럼 부자들은 대체 왜 그렇게 이상한, 피곤하고 타락한 삶을 사는 걸까요? 기타 등등. 말하자면 그런 식의 인과론은 삶에 대해서는 전혀 먹히질 않습니다.
그래서 연기법은 그렇게 외부적인 조건을 따져서는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내면을 탐구해 보자. 그랬더니 마음의 특별한 구조들이 발견된 거죠. 그럼 그런 식의 구조는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지?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생애 동안 그렇게 이어져 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서는 그런 구조를 바꾸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라고 묻는 거죠. (289~290쪽)


정화스님께서는 "불교에서는 인지 네트워크가 취하고 있는 해석의 경향성을 업"이라고 한다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업은 사유습관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사유 습관이 바뀌면 업도 바뀌게 됩니다. 업이 변하기에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습관이 그렇듯 사유 습관의 힘도 엄청납니다. 외부에서 온 어떤 자극(주로 타인의 행동이나 말)에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성은, 역시 정화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는 데 지속적으로 참여"하는데, 이는 곧 자신이 지금의 '불행한'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우리가 무의식적 업의 양상을 바꾸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 모든 걸 이번 생에 끝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생각길을 바꿀 수 있는 힌트가 가득한 책,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에서 그 방편을 하나씩 찾아 '행해' 보았으면 합니다. 간절히 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죽은 다음에 신들의 세계에 태어나는 걸 목표로 하죠. 그래서 많은 제물을 바치고 날마다 예배를 드려서 그 신에게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들의 세계에 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불교는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내세에 대한 표상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 거기에 다시 끄달리게 됩니다.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닐까’, 이런 걸 의식하면서 자기검열에 빠지게 되겠죠. 그럼 일단 마음이 늘 초조합니다. 생리적 균형도 깨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음허화동이나 상화망동의 상태에 빠지기 십상이에요. 그래서 이런 상태는 깨달음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일단 그 어떤 욕망, 기대, 표상에도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다시 말해 그 어떤 세상의 관습과 가치에도 걸리지 않으려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세속적인 욕망과 성공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지만 동시에, 저 세상에 대한 미련, 환상, 기대도 다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소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 갈 수 있겠죠. 그때 누리는 지극한 평온함과 자유, 그게 열반이라는 겁니다.(328~329쪽)


「오징어게임」에 이어, 「지옥」도 끔찍한 욕망의 아수라장을 그려 내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겠지요. 인기 드라마 시리즈 「지옥」은 누구든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공포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진수 의장(유아인 분)은 바로 이런 ‘이유 없음’이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 것이라는 ‘망상’ 속에서 ‘이유’를 만드는 데 몰두하지요. 
그런데, 이미 2600백 년 전에 ‘고지’를 받아 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네 개의 성문 밖에서 사람은 결국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고 알게 된 싯다르타가 그 사람이지요. 이 고통스러운 인간의 운명 앞에서 싯다르타는 손쉽게 이유를 만들어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처절한 구도에 나섭니다. 그리고 죄와 지옥뿐만 아니라 천국과 극락에도 매이지 않는, 그 어떤 욕망, 기대, 표상에도 걸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대자유의 길을 온 인류에게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지옥」의 정진수 의장은 싯다르타보다 더 긴 시간을 고통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해탈과 진리의 길을 찾기보다는 자신과 세상을 상처 입히는 식으로밖에 해답을 찾지 못하죠. 티베트까지 다녀와서, 왜 불경을 만나지 않았는지, 혹 만났다면, 왜 거기서 길을 찾지 못했는지, 참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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