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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팬데믹 시대에 읽는 동의보감 강의』지은이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1. 7. 8.

『팬데믹 시대에 읽는 동의보감 강의』

지은이 인터뷰

 

1.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책 『팬데믹 시대에 읽는 동의보감 강의』는 현대의학의 ‘분석적 지성’은 이런 전지구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전망하면서 그 대안으로 ‘유동적 지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분석적 지성’과 ‘유동적 지성’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일단 전제를 둬야 할 게 있습니다. 이 책은 개인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시대를 해석하고 체제를 평가하는 것은 개인이 시대의 무의식이나 사회체제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지, 거시정치적 차원에서 혹은 역사적 관점으로 이 시대를 이렇게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개인은 몸을 돌봐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있어요. 그런데 그건 개인적인 문제니까 알아서 하라고 하죠. 그래서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이란 게 몸, 마음, 관계성, 시대성 등이 섞여서 통째로 움직이거든요. 별일 없을 때는 그럭저럭 살 만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모든 것이 얽히기 시작하면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삶을 분절화시켜서 몸은 의사에게, 마음은 상담으로, 관계는 법으로, 시대의 문제는 제도에 맡기게 되고, 그 외, 기타 등등은 유튜브에서 찾아봅니다. 그 분절된 지식들의 해석이 자기 해석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거죠. 그러면 결국 내 삶의 주체가 그런 권력 장치들 안에 포획된 거 아닙니까? 그 절편된 분석을 가지고 잘 종합을 하면 될 것 같지만, 삶의 주도권을 가져오기엔 자기 해석의 틀이 너무 빈곤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그런 힘들에 의존적으로 예속되고 자기 삶은 소외되어 버립니다. 자기 몸과 삶과 자기를 둘러싼 시대를 해석할 방법론이 없어요. 많은 학문적 해석에서 개인은 늘 거시적 해석의 대상인 집단 구성원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개인이 자기의 몸과 삶과 시대를 한꺼번에 놓고 해석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다른 개인이 시련을 극복하고 터득한 사적 덕담 말고, 뭔가 방법론으로서의 장치가 있느냐는 게 저의 질문입니다. 마침 팬데믹 시대가 왔고, 굳건하게 지켜오던 사회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도 생체권력도 갈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분석적 지성이 자기 영역 내에서 해석을 하고 방편을 도출하기도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어쩌면 팬데믹 상황은 분절될 수 없는 어떤 흐름으로 파악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또 그 속에서 개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시대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 그런 것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기존의 분석적 학문체계로는 그게 좀 어렵다고 생각해요. 분석은 쪼개서 본다는 것이죠. 막연한 전체로 주어진 대상을 요소나 부분으로 나눠서 보겠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대상을 멈춰 세워야 합니다. 시간도 분절시켜야 하니까 멈춰야 하겠죠. 그리고 분절된 것들로부터 분류가 일어날 테고 그걸 설명하는 개념어들이 생겨납니다. 대개의 학문은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분석의 기법이 더 고도화될수록 개념어들은 더욱 제한적으로만 사용됩니다. 한마디로 전문용어가 되는 거죠. 그러면서 분석적 사유는 자신이 만든 개념어 안으로 다시 구속되는데, 그 사용 방식이 엄밀할수록 학문은 더욱 폐쇄적이 되어 가죠. 그래서 하나의 학문 안에서 사용되는 특정 개념어는 다른 학문 체계에서 막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문의 분석적 엄밀함은 그 자체로 학문적 위상을 높이고 뭔가 일류 발전에 나름 기여를 하고 있는 반면, 전체를 아우르거나 시간과 함께 지속되는 총체적 흐름을 보긴 어려운 겁니다. 

 

삶은 통째로 우리에게 지각되고 인식됩니다. 몸이 아픈 것 따로 있고 일과 관계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섞여서 때마다 밀도를 달리하며 우리에게 총체성으로 다가옵니다. 그 연계성과 총체성은 각각의 절편된 분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주로 우리 삶의 질을 좌우하는 키를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석적 지성의 분절성을 넘어서는 지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전적으로 분석의 반대말은 종합입니다. 사실 하나의 학문 안에서 분석은 종합과 맞물려 있습니다. 분석된 것들은 분류를 통해 다시 종합을 하기도 하니까요. 제가 말하려고 하는 분석의 대척점에 있는 건 그런 종합이 아니고, 분절되기 이전의 막연한 전체를 통째로 볼 수 있다거나, 분절이 되더라도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엔 시간의 흐름이라는 전제와 직관의 능력이 요구됩니다. 고립된 개념어들을 넘어선 총체성으로서의 지성, 이걸 두고 유동적 지성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2. 이 책은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동양적 사유 전통에 흐르고 있는 ‘유동적 지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요. 유동적 지성을 살펴보기 위한 중심적인 텍스트로 『동의보감』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동의보감』의 이론적 뿌리는 역학(易學)과 황로학(黃老學)입니다. 황로학은 도가와 도교 사상의 원류예요. 도가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강조하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의 흐름 그대로를 추구합니다. 황로학은 이 도가적 무위자연에 위에 법가의 질서를 조화시켰어요. 황로학은 이 조화를 바탕으로 한나라 초기에 정치철학으로 응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정치사상은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과 통합니다.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 그러니까 인위적 정치력을 최소화시킨 통치술인 건데 여기에 조금 더 적극적인 법치적인 질서를 더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를 무위지치(無爲之治)라고 합니다. 한의학의 가장 오래된 의서인 『황제내경』 역시 이런 황로학적 기반 위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정치철학과 의학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치국(治國)의 문제를 치신(治身)과 연결하는 겁니다. 황로학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몸은 우주자연의 시스템이 반영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다시 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으로 확장되는데요. 몸의 원리와 자연의 원리 그리고 사회 체제의 원리를 연결시키는 거죠. 이렇게 ‘몸과 우주’라는 연결체가 만들어지고 이런 원리가 초기 황로학에서는 실제 거시정치의 이념으로 쓰이게 됩니다. 후기로 갈수록 이런 이념이 정치판에서 사라지면서 황로학은 개인의 수양을 위주로 한 도교적 수련법으로 전환됩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 초기 황로학의 정치적 성향이에요. 몸의 원리가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 연결되는 이런 통치술을 삶을 관리하는 유동적 지성으로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거시정치가 아니라 개인의 미시정치 차원에서요. 그렇다면 몸을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몸의 원리로부터 세상의 원리로 확장시키려면 말이죠. 그런데 황로학이 거시정치차원에서 사용될 때는 몸에 대한 구체적인 의학적 탐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의학의 진단학적 구체성보다는 몸과 연결된 사회 현상과 우주의 원리를 통해 고도의 통치술로 활용되는 쪽에 방점을 둡니다. 의학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진단학은 개인의 차원에서만 적용될 테니까요. 그런데 이를 개인의 미시정치로 응용하려면 의학적 진단학이 더 중요해집니다. 이때는 개인이 거시정치의 맥락 속에 끼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체인 개인의 몸을 중심으로 대인관계와 시대성이 개인에게 현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선 한의학의 황로학적 원류인 『황제내경』을 텍스트로 삼으면 되겠지만, 저는 『동의보감』을 선택했습니다. 『동의보감』 안에는 『황제내경』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하고, 또 후대 의가들이 의학적이고 사상적으로 확장한 내용도 풍부하게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3. 이 책에서는 『동의보감』의 여러 면모들 중에서도 특히 도가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합니다. ‘황로사상’과 ‘무위지치’ 등 이 책에서 소개하고 계신 도가적 사유들이 어떻게 오늘날의 양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몸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괜찮은 방법이죠. 자기 몸의 상태는 마음과 관계 그리고 삶 전체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의 진단을 통해 어떤 무위지치적인 삶의 처방을 내릴 것인가를 궁구하면 좋습니다. 그건 <도담학당>(바로가기)에서 배우시면 됩니다. 물론 그런 과정을 꼭 거치지 않더라도 응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황로학의 무위지치는 무위(無爲) 사상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법가적 질서인 유위(有爲)를 얹었습니다. 무위는 뭘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유위는 ‘인위적인 함’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표면적이고 공유되고 있는 세상은 유위의 세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질서가 필요하죠. 이 세상에서 생존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그런 일들이 유위입니다. 그런데 그 바탕이 무위적이라는 것은 모든 유위는 수명이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거시정치 차원에서는 실제로 어떻게 통일된 천하를 잘 경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치국의 문제로서 무위지치를 다루었다면, 개인 삶을 다스리는 통치술로서의 무위지치는 이런 깨달음의 차원에서 응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허무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실패와 좌절, 이별과 배신을 경험합니다. 이런 삶의 위기에서 우리는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낍니다. 이 허무는 소유한 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허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극복이라는 게 잠시 눈을 가리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유위의 세계 안에서만 경험되는 것일 뿐, 더 깊은 무위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허무가 극복이 아니라 전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번뇌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많은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무위는 그런 유위적 의미를 허구로 무화시킵니다. 허무의 전략이란 이런 겁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던 소중한 그 무엇이 없어져서 허무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과연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소유 자체가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근원적 허무를 발견하는 거죠. 그럼으로써 소유냐 비소유냐의 정지된 상태가 아닌 흐름의 관계망으로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리게 되는 전략입니다. 이것이 허무의 전략인 겁니다. 그런 시야가 열리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어떤 추동력이랄까, 희열 같은 게 일어나는데, 이것은 무위지치에서 매우 중요한 유위적 가치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혼돈과 무위의 세계를 볼 수 있다 해도 결국 우리는 유위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무위지치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양생이란 게 도가 혹은 황로학적 이론을 베이스로 깔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활용도 일종의 양생적 응용법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더 중요한 것은 몸에 대해서 더 잘 살피는 것이겠지만요. 

 

 

4.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시대에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독자들이 할 수 있는 실천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적절한 경쟁은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로 쓰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적절함의 정도를 넘어서지요. 극심한 경쟁에서 스트레스 강도는 매우 높습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비교당하고 망신당하죠. 경쟁 우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 자리를 계속 지켜야 하니까 스트레스 강도는 비슷할 겁니다. 그게 계속되다 보면 몸이 망가집니다. 게다가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조차도 몸을 해치는 경우가 많아요. 술, 담배로 스트레스를 풀다가 다음날 또 경쟁에 내몰리고. 그런 게 되풀이되다 보면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경쟁시스템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여기에서 계속 살아남아야 한다면, 뭔가 삶의 방식에 변화를 주어야 하겠죠. 우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을 바꾸고 다른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 특히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몸을 해치는 시간들을 줄여서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운동입니다.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이 패턴을 바꿀 동력도 생기지 않아요. 너무 격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운동을 해서 체력을 점차 올리세요. 다른 하나는 자기 삶에서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겁니다. 공부를 하건, 그림을 그리건, 일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취미 이상의 프로페셔널한 정도의 실력을 키워 가는 겁니다. 그게 무엇이건 이것저것 하는 게 아니라 하나를 공들여 파고드는 거죠. 그러면 새로 생성한 또 하나의 세계가 자기 일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체력도 올라가고 자신감도 생길 테니 경쟁체제 안에서 좀 더 건강하게 버틸 수 있겠죠.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영향력은 또 하나의 세계에서 체험하게 되는 생장소멸, 희로애락의 이치를 고스란히 자기 일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건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밀도 높은 통찰력 같은 거죠. 그 통찰은 치열한 경쟁시스템 안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를 놀라울 정도로 감쇠시킵니다. 

 

제 지인 중에 금융기관에서 오래 동안 일하고 있는 간부가 한 분 있습니다. 거기도 경쟁이 치열했겠죠. 이 분도 그 경쟁 속에서 조급해하고 격렬하게 싸우고,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맨날 술, 담배를 달고 살았고요.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어서 그때부터 술, 담배 끊고 철학과 글쓰기에 빠져들었죠. 운동도 하고요. 그렇게 두 개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면서 묘한 자신감이 생기더랍니다. 이 경쟁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전처럼 종속관계에 놓여 있는 건 아닌 상태를 느낀 겁니다. 그의 표현으로는 “그 스트레스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지만 ‘관’(觀)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경쟁체제에서도 좀 여유를 갖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일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세번째 질문에서 답했던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의 철학 공부가 경쟁체제라는 인위적이고 정지된 세계로부터 더 큰 흐름의 세계를 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광활한 혼돈과 무위의 세계를 볼 수 있다 해도 결국 유위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삶의 희열과 추동력입니다. 이 분은 그 힘을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얻게 되는 거죠. 그의 표현대로 “남에게 꼭 보여 줄 필요 없이 생산하면서 향유”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렵다면, 그리고 몸이 많이 안 좋은 상태라면, 극심한 경쟁체제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겠죠. 『오자병법』에 “강한 적군을 만났을 때는 피해야 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병법에 어긋나지 않다”고 했습니다. 때론 피하는 전략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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