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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CDLP) 스토리

펫 샵 보이즈 [Yes] - 어디에나 들러붙고, 얼굴이 아주 많은

by 북드라망 2021. 3. 12.

펫 샵 보이즈  [Yes] 

- 어디에나 들러붙고, 얼굴이 아주 많은


음악 듣기를 좋아하는 나에겐 ‘노래로 기억되는 시절’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콱 박힌 노래들은 그 계절만 되면 다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봄, 그 중에서도 겨울과 완전 봄 사이에 있는 초봄에는 '펫 샵 보이즈'만큼 만만한 것도 없다. 계기는 언제나 그렇듯 아주 단순하고, 몹시 우연적이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봄을 맞이하여 뭔가 '씐나는' 노래를 찾다보니 여기까지 흘러왔달까. 재미있는 것은 펫샵보이즈를 듣기 전에도 '씐나는 노래'들을 찾아서 들었다는 것인데, 대개는 하루 이틀 듣고는 끝나버렸다. 그것들은 70년대 훵크와 EDM디스코였다. 처음에 들을 때는 좋았는데, 듣다보니 전자는 어쩐지 시끄럽고 더웠으며(그래서 여름을 갔지), 후자는 너무 차가 워서 다시 겨울이 된 느낌이었달까. 펫 샵 보이즈는 딱 그 중간으로서, 몹시 절묘한 '팝송'이자, '도시의 봄'에 딱 들어맞는 '댄스뮤직'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타이달에 손수 재생 목록을 만드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재생목록의 이름은 'Pet shop boys : so good!'

 



이쯤에서 나는 '좋은 팝송'의 조건들을 생각해 본다. 어떤 게 있을까? 무엇보다 '범용성'에 있다. 말하자면, 일할 때나, 놀 때나, 쉴 때나 어느 때나 들어도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 맞는 '상황'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은 팝송'이 된다. 두번째는 '다면성'일 텐데, 그것은 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떨 때는 우울하게 들리고, 어떨 때는 '씐'나게 들리고……. 오갈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러니까 음악이 품고 있는 스펙트럼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은 팝송'이다. 

펫 샵 보이즈는 어떨까? 솔직히 나는 저 두가지 조건을 두고 보았을 때 이보다 더 꼭 들어맞는 경우를 들어보지 못했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카펜터즈도, 아바도, 마빈게이나 존 레전드도 이렇게까지 범용적이면서도 다면적이지는 않다. 펫 샵 보이즈의 앨범이 아니라, 곡 하나하나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댄서블한 비트 위로 펼쳐지는 마이너한 곡 전개, 그와 동시에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가사까지, 얼핏 들으면 댄스뮤직이고, 몇번 듣다 보면 슬픔의 송가이기도 하다.

 



오늘 소개하는 앨범은 사실 펫 샵 보이즈의 '역대 최고작!' 정도는 아니다.(그런 앨범으로는 [Behaviour]를 꼽는데, 그건 그렇고, 그럼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은 [Introspective] 또는 [Very] 또는……) 오히려 이 앨범은 '부활작'에 가까운 앨범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기도 하다(으흐흐).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는 침체기를 겪은 뮤지션이 화려하게 부활하며 내놓은 앨범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펫 샵 보이즈는 [Very] 앨범의 대성공 이후로 조금씩 조금씩 (예술적으로나 판매량으로나) 퇴보해 간다는 평이 대세였으나 이 앨범 이후로 대반전에 성공한다. 수록된 'Love etc.'나 'Did you see me coming' 같은 곡들은 싱글로도 꽤나 히트하였고, 라이브에서도 자주 부른다.

 


트렌디하고, 모던하고, 엣지 있고……, 아, 뭔가 '보그스럽게' 써보려고 했으나 포기. 여하 간에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는 그야말로 '도시적'이다. 빌딩숲 사이 보도블럭 깔린 길을 걸을 때 들으면 금방 한 흰 쌀밥에 무친 지 딱 반나절 지난 겉절이를 얹어 먹는 듯이 맞춤하다. 그뿐인가, 청소기를 돌리면서 들어도 기가 막히고, 막히는 길에서 운전하며 들어도 딱 맞으며, 아이와 함께 춤추며 들어도 좋다! 컴퓨터 앞에서 들어도 좋고, 콘크리트 정글을 트래킹하며 들어도 좋다! 말하자면, 이 앨범은 대도시의 음악이다.

이쯤에서 다시 '좋은 팝송'의 조건으로 돌아가 이야기해 보자면, 이 댄서블한 음악이 가진 신비는 거기에 있다. 충만감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공허감이 지배적인 정서인 '도시의 봄'에 아주 잘 들러붙는다는 것이다. 음악이 공허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빈 곳을 채우는 음악이랄까. 도시의 어디에나 들러붙고, 얼굴이 아주 많은 그런 음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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