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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지빠귀 부리 왕」 - 웃지 않는 공주의 그림자 노동

by 북드라망 2020. 11. 24.

「지빠귀 부리 왕」 , 동화의 행위

- 웃지 않는 공주의 그림자 노동



공주를 웃겨라!

    

그림 동화에는 종종 웃지 않는 공주 이야기가 나온다. 레비 스트로스는 웃지 않는 공주란 자기 왕국의 어떤 남자에게도 만족할 줄 모르는 여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외혼제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공주를 웃기는 자가 늘 성 밖에서 ‘멋도 모르고’ 찾아와서 웃겨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공주 나라의 상식이나 관습에 무지했기에, 공주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제들을 뒤집을 수 있기에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왕자는 가장 늦게 온다. 동화가 괜히 듣는 사람 감질맛 나게 하려고 웃기는 왕자를 제일 마지막에 출현시키는 게 아니다. 왕자는 공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와야만 했던 것이다. 공주가 갖고 있는 통념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자, 그만이 공주를 얻는다.    


    



동화가 웃지 않음과 웃김의 관계에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웃음이란 갇혔던 숨이 터지면서 진지했던 분위기를 돌연 활발하게 바꾼다. 갑갑했던 공기를 활짝 열어서 신선한 새 기운이 문득, 활발히, 일어나게 한다. 공주가 웃지 못했던 까닭은 무거운 것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것, 중요해서 놓을 수 없는 것, 공주는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전부라고 믿었다. 새로운 생각이나 느낌을 가져볼 꿈도 꾸지 않았기에 웃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웃어야만 결혼할 수 있는 공주의 운명을 동화가 즐겨 이야기하는 까닭은 분명해 보인다. 웃기는 왕자 덕분에 공주는 자기 삶의 무게중심을 의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어떤 지배적 가치의 무거움을 덜어내는 운동 속에서만 존재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 

    

외혼제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대칭성 인류학의 관점에서도 웃지 않음과 웃음을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동화는 문화와 자연, 왕궁과 숲, 인간과 동물 사이의 비대칭을 맞추기를 좋아한다. 그런 관점에서 잘 생각해보면 고귀한 출생을 가지고 있던 동화 속 여자 주인공들은 가장 고귀한 자리에 있다가 부뚜막으로(재투성이 아센푸텔(신데렐라)), 난쟁이들의 반 지하 마룻바닥으로(백설공주), 끝없는 나락의 잠 속으로(숲 속의 잠자는 공주) 추락했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공주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태어난 막내딸들도 자기 때문에 집 밖으로 쫓겨난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 헐벗고 굶주리면서 숲을 헤매는 모험 끝에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곤 한다(「열 두 오빠」, 「일곱 마리 까마귀」). 공주의 혼담을 중심으로 웃지 않음과 웃음 사이의 비대칭을 맞춘다는 것은 왕국과 시정, 중심과 주변의 비대칭을 조절하기 위한 동화적 무의식의 반영일 수가 있다.  

    

그런데 한번 웃고 난 공주는 이제 어떻게 될까? 자기가 중요하게 붙들고 있던 것이 만고의 진리가 아니라 그저 나나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는? 웃지 않는 공주의 혼담 이야기 중에 이 ‘웃음의 철학’을 더 밀고 가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지빠귀 부리 왕」이다. 이 이야기 나오는 공주는 직접적으로 ‘웃지 않는다’라고는 되어 있지 않다. 또 왕자가 일부러 웃기는 것도 아니다. 여기 공주는 오만하기로 악명이 높아 구혼자를 비웃으며 괴롭히기만 했는데, 그러다가 한 왕자를 보고 빵 터지고 만다. 그 왕자가 턱이 좀 나와 있었던 것이다. ‘아! 당신은 지빠귀 부리 왕 같아요! 깔깔깔!’ 공주를 웃기는 자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공주의 무거움을 새의 가벼움으로 덜어준다는 뜻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왕이 자신의 딸이 너무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결혼이고 뭐고 궁성을 찾아오는 첫 번째 거지에게 그녀를 시집 보내버리기 때문이다. 이 거지는 거리의 악사이기에 공주는 그와 함께 온 마을과 숲을 전전하게 된다. 궁궐이 전부인줄 알다가 세상에는 커다란 숲도, 초원도, 커다란 도시도, 작은 오두막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공주는 자기 힘으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어쩌나 재주가 없는 것이다. 백설공주나 재투성이 아센푸텔은 그래도 집안일에 능해서 난장이들, 부엌의 쥐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으며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빠귀 부리 왕의 공주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라 완전히 곤란하게 된다. 그녀는 손에 물을 묻히는 정도가 아니라 맨손으로 흙을 파서 먹을 것을 찾고 남의 궁궐에서 남은 음식을 받아 돌아오는 등 온갖 험한 일을 해서 입에 풀칠 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거지 남편이 실은 지빠귀 부리 왕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금의환향하게 된다. 이 흙손 공주의 웃음은 가혹한 노동과 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노동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차원까지 보여준다. 결국 공주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구걸밖에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거지의 아내이니 거지가 되어도 이상할 것 없지만, 동화가 이렇게까지 공주를 몰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의 손이 너를 구한다

    

동화는 전근대적 상상력이 넘쳐나는 시공간이기에 여성의 일을 오직 밥하고 빨래하고 옷 짓는 것밖에 상상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동화가 보여주는 공주의 일은 두 가지 점에서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노동과 다르다. 첫째, 공주의 노동에서 결국 부각되는 것은 그녀의 손이다. 원래 그림 동화는 재봉이나 바느질(브리콜라주)을 높이 평가한다. 저주에 걸린 오빠를 구하기 위해 여동생들은 모두 가시옷을 짓는다. 밤에 몰래 신발을 고쳐주는 요정도 있다 등. 또 부엌에서 재투성이가 되는 것에도 박수를 보낸다. 재라는 것은 그 장소가 만물을 소화시키는 거대한 카오스의 장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를 먹이는 것 자체가 거대한 자연의 순환 고리에 뛰어드는 일이므로 아궁이 근처에 있는 자는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지빠귀 부리 왕의 공주는 손으로 옷이나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그녀는 완제품을 만들 줄 모른다. 처음에 남편이 어디서 주어온 지푸라기로 바구니를 짜보았는데 바구니나 실은 또 다른 목적에 봉사할 것이 기대되기 때문에 이 노동은 오직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물론 공주는 바구니도 실도 짜지를 못한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남편이 길에서 주워온 옹기 같은 것을 팔러 나가는데 지나가는 술취한 군인이 말발굽으로 옹기들을 치고 달아나 버려 장사에도 실패한다. 공주가 말 다니는 길목에 자리를 깔았던 것이다. 완제품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조차 못한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번에는 왕궁의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또 욕을 먹고 만다. 그녀가 직장에서 들은 최후의 말은 이러했다. “그만 우시오. 당신이 뭔 하나 제대로 된 일은 못하는 사람인 걸 잘 알았소!” 결국 공주는 주방의 궂은 일을 다 해주고 음식이 남을 경우 그 중 조금을 가져오는 것으로 자기 손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다. 

    



공주의 손은 생산하지 못한다, 선의도 악의도 없는 장소에서 어쩌다가 발견되는 먹을 것을 집어 나를 뿐이다. 그 손이 일을 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가로 얻은 것은 남의 손이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적 노동이 낳는 소외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보다 근원적인 가르침이 이 흙손을 통해 말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주가 구걸하다시피 한 음식을 싸들고 오는 대목을 보도록 하자. 뭉클하다.  


“그리하여 공주는 부엌데기가 되어 요리사를 도와주고 아주 궂은 일을 해야 했다. 공주는 남은 음식 중에서 자기 몫을 단지에 담아 움직이지 않게 양 주머니에 잘 넣어 가지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들은 그것을 먹고 살았다.”

  

공주는 오늘 남은 음식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것을 소중하게 들고 집으로 와 굶고 있을 남편을 먹인다. 지금 공주는 먹고 산다는 것이 타인의 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를 위해 그 많은 궂은 일들을 하지 않았다. 집에 있는 누군가, 어쩌다 자기랑 살게 된 한 남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전부를 했다. 소중하게 들고 있던 음식 찌꺼기가 궁궐의 홀에서 쏟아져 모든 사람들의 놀림이 되는 것마저 감수하면서 말이다. 공주는 먹고 사는 일의 존엄함에 압도되어,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모든 존재의 신산한 운명을 절감한다.         

    

이 노동의 두 번째 특징은 매번의 실패이다. 공주가 만약 재봉이나 요리에 능했더라면 옷방이나 주방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난쟁이들이 백설공주가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왜 말렸겠는가? 백설 아가씨가 집안일을 워낙 잘해서다. 그런데 우리의 공주는 재주가 워낙 없다보니 온갖 일들 ‘사이’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 여러 국면 국면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이 공주가 다른 나라 궁궐의 주방에까지 가게 된 것은 그녀가 주파한 세계가 참으로 넓고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빠귀 부리 왕」이 포착하는 노동의 본질은 생산이 아니라 ‘연결’인 것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그것도 자기 손을 써서 하는 일을 통해서만 세상과 접속할 수 있다. 공주는 처음에는 왕궁 밖에 숲, 초원, 대도시, 작은 오두막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손을 써서 그것들과 접속했다. 숲, 초원, 대도시, 작은 오두막은 정말 제각각 달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엄중한 생의 목적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분투한다. 잔디를 이해한다는 것은 뭘까? 백과사전을 뒤져서 잔디에 관한 정보를 찾아내는 것? 아니다. 우리는 밟아보아야만 한다. 새벽과 해질녘의 잔디가 다르고 봄과 겨울의 잔디가 다르다. 막 걷기 시작한 아이의 발이 다르고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노인의 발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겨우 오늘 이 아침에 밟아본 우리 동네 잔디의 느낌만을 안다. 잔디에 대한 완전한 앎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이해는 실패다. 그런데 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똑같은 잔디란 없다는 진리에 도달한다. 

    

공주는 손으로 세상 도처에서 꿈틀대는 온갖 진리들과 접속했다. 그녀의 모든 실패는 세상의 여러 가지 국면들을 이해하고 통찰하기 위한 시도였다. 우리는 손을 통해서밖에, 구체적 행위로서밖에 세계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치루어야 하는 사소하면서도 반복되는 일들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이해해야 하며, 이 이해는 내 손으로서밖에 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아버지에 의한 강제적 혼인! 거지와의 결혼! 이 황당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남편을 먹인다. 그 어떤 것도 자기 선택이 아니었는데 왜 이토록 큰 짐을 지는가? 어쨌든 혼자보다는 둘이 먹고 살기가 더 쉬우니까? 맞다. 현실적 필요가 공주로 하여금 그런 겸손을 갖게 한 것이겠지. 한때 공주는 왕자를 고를 수 있었다. 동화는 그런 자유의지적 선택에는 관심이 없다. 잘 산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외적 조건을 이해하는 문제이지 내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먹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살리는 것이 타인임을 안다면, 지금 내 곁에 누가 있든지 간에 그는 귀하다. 겨우 얻은 음식 찌꺼기를 흘릴까 싶어 귀하게 가지고 돌아올 때 공주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왕궁에 앉아 있는 처지라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데까지 묵묵히 겸허하게 걸어가게끔 밀어주는 동반자, 그녀의 남편. 공주는 거지 남편이 정말로 고마웠으리라.   

    


그림자 노동의 바퀴 아래에서


한때는 나도 공주였다. 나밖에 몰라서, 내가 좋은 일만 하고 살았다. 나를 위한 학업, 나를 위한 사업. 그런데 아이들을 낳고 나서 그림자 노동의 엄청난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고 말았다. 너를 위한 육아, 너를 위한 가사. 내 욕망과는 상관없이 타인을 먹이고 살리는 일에 영혼과 몸을 갈아 넣고서 ……. 

    

육아와 가사 노동이 힘든 까닭은 내가 그것을 ‘그림자 노동’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집안을 건사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니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도 보고 있고 또 가끔은 설거지나 빨래 개는 일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해야 할 일’로 진정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에게 집안일이란 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수단이 되는 일,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안할 수 없는 일, 더 나아가서는 배달음식 시켜 먹거나 세탁소에 옷을 맡기거나 하는 식으로 돈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돈 안되는 일’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노동이 임금을 전제로 생각된 것은 18세기 이후라고 한다.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로 임금 노동을 가능케 하면서도 임금화되지 않는 노동을 개념화함으로써, 현대적 삶에서 일어나는 경제적 효용의 환상과 그로 인한 소외를 비판했다(『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노동을 ‘가치’나 ‘긍지’, ‘즐거움’ 등으로 수식하면서 과대포장하고 임금과 교환될 때 비로소 의미있는 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정말 인류 역사상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오늘날 ‘일’이나 ‘노동’은 곧바로 ‘임금’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돈을 받고 하는 노동은 유럽의 중세 내내 비참함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원칙상 중세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저마다 제 자리를 마련해주었으며 공동체는 구조적으로 실업과 궁핍을 차단하고 있었다. 자급자족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삶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만들어서 쓴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각자가 자기밖에 할 수 없는 노동을 통해 공동체 전체가 필요한 어떤 가치를 생산해 내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각자의 노동 또한 공동체에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서 평가받았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 자체가 삐그덕 거릴 것이고 결과적으로 내 삶도 위협받을 것이기에 사람들은 가장 이기적인 동기에서 모두를 위해 일했다. 그러한 사회에서 돈을 받고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무능력자였다. 가난한 자는 디베스(dives, 부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포텐스(potens, 능력자)가 아니기에 동정받았다.             

    



처음에는 동화에서 공주가 부엌데기가 된다는 것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부엌일까? 왜 하필 가시옷일까? 를 생각하다가, 왜 이렇게 일하는 장면이 많은지를 생각하다가, 문득 발견했다. 살려라! 동화는 이 단순한 진리를 철저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지빠귀 부리 왕의 공주가 거지 남편을 살리고, 저주에 구한 오빠를 살리고, 광부 난장이들을 살리고, 못된 계모와 이복 언니를 살리고, 그 타인이 누가 되었든지 간에 남을 살려야 기회가 온다. 내가 살 기회가. 바로 옆 자리를 살리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나를 둘러싼 세계가 수많은 타인들의 공생터임을 전제로 한 발상이다. 

    

갑자기 우리의 전래 동화 한편이 떠오른다. 방귀를 유난히 크게 뀌는 며느리 이야기 말이다. 시집에서 구박을 받을까봐 자신의 방귀를 숨기느라 고생했던 며느리는 결국 그 방귀로 동네의 도둑을 잡고 곡식을 훔쳐가는 새를 쫓는 능력을 발휘하여 한 집안만이 아니라 온 동네의 큰며느리가 된다. 무겁기만 한 내 고집을 내려놓고 온 동네 구석구석에 까지 내 어리석고 부족한 노력 즉 방귀를 보낼 수 있을 때, 며느리는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기뻐서 웃고 온 동네 또한 함께 웃는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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