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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모비딕』과 함백, 그리고 『천 개의 고원』

by 북드라망 2020. 8. 24.

*지난 주 세상에 나온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의 저자 오찬영 선생님의 또다른 <모비딕> 프롤로그를 소개합니다. 책에 실린 버전과는 다른, <모비딕>과의 인연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책과 더불어 함께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모비딕』과 함백, 그리고 『천 개의 고원』



때는 2018년 12월 31일. 바야흐로 2019년 새해를 맞이하는 2018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모비딕』과의 만남을 되돌아봤을 때, 이 하루치의 시간은 결코 빠질 수가 없다. 2019년에 금요 대중지성과 장자스쿨을 시작하게 된 사람들이 강원도 함백에 모여 예비 OT를 가진 날이었던 것이다. 일성 2년을 거쳐 막 장자스쿨로 입학 신고는 했지만 그 전환이 뭘 의미하는 건지는 전혀 감이 없는 상태였다. 예비 OT를 그저 대학교 MT와 회사 워크숍 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다른 학인의 차를 얻어 탄 채 털레털레 아무 생각 없이 강원도 함백으로 갔다. 서로 얼굴이나 익히고 노는 줄 알았건만, 바로 첫 날 밤에 전부 빙 둘러앉아 올해 자신이 어떤 고전을 선택할 것인지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1차로 멘붕이 왔다. 

   



몇몇 책을 후보군에 올려두긴 했지만 꺼내서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방학 동안 정줄 놓고 신나게 팽팽 놀았다는 대책 없는 소리를 당당하게 할 자신은 없었기에,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 다음, 나보다 앞서서 자신이 택한 고전을 설명했던 학우들이 불호령 같은 곰샘의 언질에 하나 둘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보였다. 2차 멘붕. 설상가상으로 나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건 또 있었다. 하필 함백으로 오는 날 아침에 생리가 터졌던 것이다. 보통 생리를 하는 첫 날에 어마어마한 설사와 편두통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뱃속에서 빨리 화장실로 가라고 우렁찬 천둥소리를 내는데 분위기는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깊은 적막으로 가라앉고, 곧이어 쥐새끼 지나가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의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곰샘의 (분노에 찬)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3차 멘붕. 

   

곧 잠자리에 들 줄 알고 태평한 마음으로 땡땡이 수면 바지를 입고 앉아있었던 나는 얼굴을 푹 숙인 채 생각했다. ‘돌겠네...’ 눈 주위로부터 시작되어 관자놀이까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게, 편두통 때문인지 지금 이 상황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냥 튈까? 튈 수는 없었다. 혹시 튀는 사람을 방지하려고 강원도 깡촌에서 한겨울에 OT를 진행하는 건가? 별 희한한 온갖 망상이 다 스쳐지나가는 머릿속과 불안정한 신체를 겨우 부여잡고 있는데 드디어 내가 말할 순서가 되었다. 온 신경이 배와 아랫도리로 전부 쏠려있는데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진 상태라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횡설수설 그 자체였다. 

   

“제가...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1년 동안 한 권의 책만 계속 읽는다는 게... 너무 어려워보여서... 재밌는 걸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성경을 수십 번 읽었거든요? 근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성경이 재밌잖아요? 이야기도 많고... 그러니까 문학 작품 할래요. 소설이요.. 버지니아 울프나 카프카, 아님 『모비딕』 같은 거요.” 성경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모비딕』으로 튀는 난데없는 맥락을 스스로도 느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뱃속에 배출되지 못한 설사를 담고 있으니 똥 같은 말만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곰샘이 “야, 니가 기독교인인데 성경 많이 읽는 건 당연한 거지!”하시며 콧방귀를 뀌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그럼 『모비딕』? 『모비딕』 해봐라.” “예.” 그 날의 누런 장판과 주황색 조명, 땡땡이 무늬 바지, 바닥 온돌은 엉덩이를 뜨끈하게 데우는데 목 위로는 냉랭한 공기가 흐르던 그 날의 분위기, 올락말락하는 설사기와 생리... 이 모든 혼돈과 어지러움, 두통과 복통이 교차하는 가운데 2019년의 내 파트너가 결정되었다. 그게 바로 『모비딕』이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 카프카, 『모비딕』 이 셋이 전혀 뜬금없이 튀어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버버하며 말을 하느라 하나 건너 뛴 스텝이 있는데,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다. 2018년 일성 마지막 학기에서 『천 개의 고원』을 공부했었는데, 그때 『모비딕』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급한 수많은 문학 작품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카프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10번째인 ‘되기’ 고원에서 그들은 확실한 찬사를 보낸다. “『모비딕』 전체는 되기에 대한 최고 걸작의 하나이다.”(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역, 새물결, 2001, 463쪽) 그 때부터 『모비딕』을 언젠가 한 번쯤은 읽어봐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언젠가가 바로 그 다음 해에, 그것도 이렇게나 본격적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내게 이 책을 소개시켜준 셈이다. 그래서 그렇게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모비딕』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하필 더듬거리며 함백에서 이야기했던 문장들 속에 『모비딕』에 대해 내가 느꼈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전부 들어있다. 첫 번째는 재미, 재미 하나는 끝장나게 보장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 두 번째로 성경, 즉 기독교적 모티브가 정말 핵심적인 소설이라는 것. 그래서 OT가 끝나고 함백에서 돌아와 책을 펼쳐봤을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겸비한 소설이라니. 처음 몇 장을 읽어 내리며 단숨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책보다 더 나은 책은 지금 내게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나는 1년 내내 『모비딕』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내가 이 책을 만나 글을 썼던 2019년은 허먼 멜빌 탄생 200주년이기도 한 해다. 허먼 멜빌은 자신이 태어난 지 정확히 200년 후에 저 먼 동양의 청년 한 명이 자신의 글을 1년 내내 읽고 작품들을 전부 숙지하느라 고군분투하리라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이런 기이한 인연과 만남에 대해 이미 『모비딕』은 깔끔하게 설명한다. 


“이보게들, 이 사건에는 마치 세상의 지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모든 게 계획된 것처럼 야릇한 운명이 개입했다네.”(허먼 멜빌, 모비딕, 강수정 역, 열린책들, 2013, 424쪽) 

   



미리 모든 것을 정해놓은 운명의 장난이라? 이 말은 단순히 모든 시간과 사건이 시나리오처럼 결정되어 있다는 수동적인 숙명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저 눈앞에 우연의 조합으로 일어난 것만 같은 작은 사건들이 사실 돌아보면 우주적인 필연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연결성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필연적 연결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감각을 하나 틔우는 것, 그래서 삶은 언제나 경쾌한 육중함과 아름다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그렇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빌려보면, 이것은 일종의 ‘분자-되기’의 시선이기도 하며, 지각 불가능한 것을 감지하게 한다. 우주적인 찰랑거림 속으로 나아가기!


또한 모비딕은 에이허브를 조용하게 어디로 이끌고 가는 것일까? (...) 박테리아 되기, 바이러스 되기, 분자 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등으로 이행해 간다. (...) 온갖 종류의 영향 아래에서, 차츰 차츰 분자 되기를 향해 나아가며, 드디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하고 지각 불가능한 것을 나타나게 하는 일종의 우주적인 찰랑거림 소리 속으로 나아간다. -천 개의 고원, 473쪽

   

흰 고래는 그렇게 내게 분자-되기의 시선을 알려주었다. 미시적 분자-되기의 시선으로 우주적인 파동을 잡아내는 열린 몸이 취할 수 있는 행위 중 하나는 글쓰기다. 원고를 계속 써나가면서 내 앞에 벌어졌던 모든 현장들, 인연들과 자잘한 배움까지 죄다 끌어다가 써먹고, 늘 의문이었던 질문까지도 전부 데려와 내 나름대로 찬찬히 관찰하며 목차를 잡고 길을 내며 써나갔다. 그 과정 속에서 곰샘과 장자 학인들의 열렬한 도움이 있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분자적 시선 위에서 『모비딕』에 대한 글은 언제든지 계속 생성되고 분출될 수 있음을 실감한다. 나를 지켜봐주고 기꺼이 데드라인을 걸어준 인연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글을 쓰며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들이 있었다. 드디어 집을 떠났고, 이제 난 비로소 길 위에 섰음을 실감한다. 흰 고래를 동반자로 삼아 떠난 기해년의 첫 여행은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시작이었다. 고로 이제 막 발견한 이 재밌는 행로를 결코 멈출 일은 없을 듯하다. 

   

그렇게 2018년이 거의 끝나던 그 마지막 날에 『모비딕』과의 만남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2020년 08월 20일, 첫 책이 나왔다. 차가운 함백의 겨울에 느닷없이 뿌려졌던 씨앗은 약 1년 8개월가량의 시절을 차곡차곡 자라났고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 속에 모든 추수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 프롤로그는 원래 미완성인 채로 내 노트북 폴더 어딘가에 묵혀져 있을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레 꺼내졌다. 이렇게 재작년 마지막 날의 에피소드를 기어코 완성하는 날이 올 줄이야! 모든 원고 작업을 마치고 난 뒤 수정하는 또 다른 프롤로그라니, 색다르면서 또 쑥스럽다. 글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다 끝났겠지! 이제 『모비딕』을 다시는 쓸 일이 없겠지!”하고 시원섭섭해하는 순간에 이런 말을 정확히 비웃으며 다시금 나를 맨 처음으로 금방 데려다놓으니 말이다. 이렇게 시간은 중중무진하게 섞여버리고, 나는 끝과 시작을 도통 분간하지 못한 채 즐겁게 글을 읽고 고친다. 이제는 『모비딕』을 서서히 떠나보내며 다른 고전으로의 여행을 주섬주섬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글의 성격은 아주 독특하다. 에필로그 성격의 프롤로그라고나 할까? 혹은 『모비딕』에게 고하는 송별사이기도 하면서 또 다른 여행을 위한 환영식일 수도 있겠다. 이럴 때는 『모비딕』의 첫 장에 나오는 이슈메일의 독백이 참으로 적합하다. 육지를 떠나 바다로 향해 방향을 전환하는 그의 인사말 말이다. 새로운 여행을 계속해서 추동할, 내게 있어서는 영원히 남을, 끝과 시작의 문장이다. “이런 이유로 고래잡이 항해는 반가운 일이었다. 이제 경이의 세계로 통하는 거대한 수문이 열렸다.” (모비딕, 37쪽) 


글_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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