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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도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by 북드라망 2019. 5. 7.

도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연작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1.

도시는 난산 끝에 태어났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의 감시와 탐욕스런 투기꾼들의 눈치싸움, 변두리로 추방당한 사람들이 있은 끝에 남겨진 땅 – 그 땅 위로 탐식하듯 허겁지겁 올라간 빌딩과 아파트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도시의 모습이다. 그런 까닭에 도시에는 항상 ‘메마른’, ‘삭막한’, ‘차가운’, ‘외로운’ 따위의 형용사들이 달라붙는다. 우리는 제각기 흩어져 홀로 부유하는 도시의 사람들을 상상하며 또한 그 상상을 실제로 살아간다. 그것이야말로 ‘도시다움’이다.

그리고 ‘도시다움’에 익숙한 나와 아이들에게 『원미동 사람들』 이 그리는 도시의 모습, 80년대 부천시 원미동의 풍경은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양귀자는 『원미동 사람들』 작가 후기에서 그녀가 영위했던 원미동에서의 삶을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한동네에서 6, 7년을 산다는 일은 이웃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이웃들이 무슨 벌이를 해서 먹고살며, 앞으로의 희망은 무엇인가를 흐릿하게나마 짐작하고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작가 후기)



도시에서의 6, 7년이란 시간이 이웃의 이름을 알고 그들의 생업을 알고 그들이 꿈꾸는 삶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가? 가엾게도 아이들은 무언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쏘공』도 아이들에게 낯선 도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는 하나 그 책은 하다못해 제목이라도 몽환적인 느낌이 든다. 하지만 『원미동 사람들』 은, 구체적인 실제 지명까지 더해진 그 직관적인 제목은 이번에야말로 ‘익숙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줄 것만 같은 기대를 품게 하고서 또 한 번 녀석들을 배신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원미동 사람들』이 『난쏘공』에 비해 훨씬 친절한 책임은 분명했다. 적어도 등장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이 현학적이지는 않으니까. 그 아옹다옹한 다툼들도 친구나 형제자매끼리의 다툼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도 마냥 설명하기보다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제목의, 동네의 두 슈퍼가 비슷한 품목을 취급하며 경쟁하게 되면서 일어난 일을 다투는 에피소드였다.


“김반장 말도 맞아. 어쩔까. 이번에는 형제슈퍼에서 연탄 백 장 들여놓아야 할까봐.”

“할 수 없잖아. 김포 몰래 우리도 이십 킬로그램짜리 쌀 팔아줬어. 괜히 경호 아버지 눈치가 보이고, 참말 내 돈 내고 쌀 팔아주면서 무슨 죄를 짓는 것처럼 이게 뭐야.”

“이번에는 김포 슈퍼, 다음에는 형제 슈퍼,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럼 계란이니 두부니 라면도 일일이 나눠갖고 사러 다닐꺼여? 아이구, 난 이젠 늙어서 기억력도 모자라는디 헷갈려서 그 짓 못혀.” (274-275)

 

두 슈퍼 주인들은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동네 여인들은 어느 슈퍼에서 물건을 사야할지 고민에 빠진다. 아이들은 이러한 상황 자체는 쉽게 이해했다. 한 친구랑 너무 친하게 지내면 다른 친구가 서운해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친구들 사이의 다툼이 아닌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 상황에서 이런 고민을 한다는 사실에는 매우 낯설어했다. 너무 답이 당연한데 왜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 어느 슈퍼에서 살지 고민해요? 그냥 둘 중에 더 싼데서 사면 되잖아요?”

 

왜 물건을 사는 입장인 우리가 슈퍼 주인들의 사정을 일일이 다 생각해야 하는가? 가족도 아니고, 학교 친구도 아닌데. 돈을 건네고 물건을 사는 그 과정만이 슈퍼 주인과 나 사이의 유일한 연결점인데.

그런데 왜 원미동 사람들은 형제 슈퍼 주인에게 딸린 식구가 몇이고, 김포 슈퍼 내외가 작년 내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고, 그러한 사정들을 일일이 따질까. 아니, 애초에 그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들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너희 학교 갈 때 집에서 몇 시에 나와?”

“여덟 시 쯤이요……?”

“나와서 엘리베이터 타면, 다른 사람이랑 같이 탈 때 있지?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이랑 같이 탈 때도 있나? 마주치거나.”

“네.”

“그 사람 이름 혹시 아니?”

“아뇨.”

“학교 갈 때는 버스 타거나 하지? 기사 아저씨 이름은 혹시 알아?”

“…….”

“학교 끝나고 다른 곳들도 들르잖아. 편의점이나 분식집이나 PC방이나 뭐 다른 곳들……그 중에서 혹시 이름 아는 사람은?”

“…….”

“가족이랑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 빼고, 하루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서 이름 아는 사람 있어? 이름이 아니면 뭐 다른 거……가족이 누가 있고 뭐 그런 거라도.”

“…….”

“우리는 매일 똑같은 루트 따라 살잖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버스 타고, 똑같이 학교 갔다가, 똑같은 길 따라 학원 들르거나 집 오고……잠깐 스쳐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매일 보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 왜 우린 그 사람들 이름을 잘 모를까……?”

“…….”


아이들은 대답 대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두 개의 물음이 읽혔다. “선생님은 어떤데요?” “왜 그런데요?”

앞 질문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뒷 질문에 대해서는, 조금 고민이 필요했다.

     

 

2.   

형장이건, 전쟁터건, 어떤 역사가 있던 땅이건 간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초목이 우거진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부패한 권력과 추방당한 사람들의 기억이 다 지워지지 않았다 해도 새로이 사람들이 모여 들면 그 자리에 새로운 공동체와 관계망이 형성된다. 어떤 학자들은 그 새로운 관계망에서 가능성을 읽어냈다. 그들이 포착해낸 건 도시가 아우르는 수많은 특이성과 이질성이었다.


「그들은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충청도에서, 강원도에서, 그야말로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다. 연탄 배달도 하고 날품팔이도 하며 공장에도 다니고 그렇게들 산다. 또 회사원도 많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장사를 해서 먹고살기도 한다. 한국 사회의 이주 현상을 무슨 표본실처럼 보여주는 이 도시의 안간힘을 나는 동병상련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 연작을 구상케 하였다……」 (작가 후기)

 

도시에는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서로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타자他者들이 섞여있다. 그 혼란스럽고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함께 살아나갈 방법을 발명해야 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내 옆에 있기에 이전의 방식, 나에게만 익숙한 방식을 고집해서는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충돌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충돌을 마냥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변화시킬 것인가이다. 그리하여 배경도 삶의 방식도 가치관도 다른 이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봉합하기를 반복하면서 공존의 길을 –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나가리란 게 학자들이 도시에 기대한 가능성이었다.




『원미동 사람들』은 그러한 과도기에 놓인 도시 공동체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연작이라는 형식에 걸맞게 매번 서로 다른 삶들을 그려낸다. 땅은 파는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것이라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노인, 추레한 옷을 입고 동네를 거닐며 시를 읊는 백수 청년, 젊음을 화류계에 바친 다방집 여인……그들이 맞닥뜨리는 원미동의 삶은 비슷한 결을 타는 듯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다르게 비친다. 그 이야기들을 거듭하여 읽다보면 특이성이니 타자성이니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도시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잔뜩 모여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사실은 마찬가지다.


다만, 바뀐 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뒤엉켜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늘날 도시는 ‘정비되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정비를 지향한다. 여기서 정비한다는 것은 뒤엉켜 있는 서로 다른 것들을 각기 같은 것끼리 분류하여 더 이상 섞이지 않도록 구분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각자가 맺어나갈 관계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있어 아마도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리는 예시는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른 계층 구분일 것이다. “임대 아파트 단지에 다니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렴.”, “자꾸 ○○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들어와서 우리 단지 놀이터를 이용하는데,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못 사는 집 아이들과는…….” “공부 잘 하는 애들이랑 어울려야지…….” 지극히 전근대적인 욕망의 향기를 풍기는 이러한 발화들은 동일 계층 혹은 상위 계층과의 관계 형성은 긍정적인 것으로, 하위 계층과의 관계 형성은 부정적이며 회피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서로 다른 계층의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이 접촉할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직관적인 예시일 뿐이다. ‘정비’의 규정과 제약은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오늘날 도시인들의 삶을 규정한다.

 

「그런 몽달씨에게 친구가 있다면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었다. 몽달씨 나이가 스물일곱이라니까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지만 우리는 엄연히 친구다.」 (103p)

 

『원미동 사람들』 중 <원미동 시인>이란 에피소드의 화자는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다. 이 당돌한 소녀는 동네의 백수 청년이자 시인을 자처하는 ‘몽달 씨’와 자신이 친구라고 말한다. 스물일곱 살짜리 남자와 일곱 살짜리 소녀의 우정. 이 역시,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불가능한 관계이다. 우리가 보기에 스물일곱 살 남자와 일곱 살 소녀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은 오직 둘 뿐이다. 교사-학생(학교), 가족(가정), 아니면 범죄. 학교나 가정이라는 안전 영역에 포함되지 않은 스물일곱 살 시인 지망생은 둘 사이의 우정이 어쨌고 저쨌건 간에 곧 공포스러운 존재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오늘날 정비된 도시의 궁극적인 구분 원칙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단 두 종류의 관계-거리만이 존재한다. ‘낯익고 친근해야 하는 관계’와, ‘낯설고 두려워해야 하는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동일성의 관계이고, 후자는 타자성의 관계이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전자는 집과 학교의 관계이고, 후자는 그 외의 모든 관계이다. 심지어 아이들에게는 저러한 관계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조차 없다. 아이들에게는 맺어야 하는 관계의 가이드라인이 처음부터 ‘주어진다.’ 집과 학교라는 ‘내부’에서 맺는 관계들은 사적이고 친밀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그 외의 모든 ‘외부’는 낯설고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다. 슈퍼 주인은 당연히 후자에 해당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슈퍼 주인의 이름과, 그의 가족 관계를 물어야 할 까닭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화폐를 이어주는,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 외에 또 다른 관계의 가능성이 있음을 상상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기에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낯선 것들이 충돌하여 새로운 것을 낳는’ 도시는 이미 옛말이다. 도시에는 여전히 다른 것들이 모여 있지만, 오늘날 도시에서의 공존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더욱 치밀하고 효율적인 분류법에 다름 아니다.

    

 

3.

『원미동 사람들』이 그리는 풍경은 결코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 그 풍경에는 인심 좋은 시골을 떠올리게 하는 인정과 연민이 있는가 하면, 언제부터인가 도시다움이라 말해지게 된 박정함과 차가움도 있다. 또 시골 마을에서 볼법한 특유의 폐쇄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것에 관대한 도시의 개방적인 면모도 엿보이고, 또 그 사이를 오가는 우유부단함과 유연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 천태만상의 일상 속에서 원미동 사람들이 서로를 향한 참견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참견 속에서 동네 사람들의 관계는 충돌, 회복, 변화, 죽음과 생성을 거듭한다. 영영 끝나버리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새롭게 시작되는 관계가 있고, 변함없이 이어지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변해가며 이어지는 관계도 있다. 그 모든 과정이 원미동이라는 공간에 역동성과 주체성을, 다시 말해 삶을 불어넣는다.




그에 비해 오늘날 도시의 풍경은 보다 안정적이고 고정되어 있다. 낯익은 것은 낯익은 채로, 낯선 것은 낯선 채로 남아있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매일매일 같은 루트를 따라가는 일상은 아이들에게 지독히도 낯익은 것이다. 하지만 그 루트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존재하는 광활한 외부는 녀석들에게 완전히 낯선 것이다. 그러한 도시는 철저하게 익숙하면서 철저하게 낯선 공간이며, 처음부터 주어지는 공간이지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공간은 아니다. 그 평면 속에서 아이들을 싸우는 방법을, 화해하는 방법을, 말하는 방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잊는다. 알아야할 것은 모두 미리 주어지기에 아이들은 도시에게 그 무엇도 묻지 않는다. 어른들도 도시에 말을 걸지 않는다.


오늘날 도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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