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돼지 만나러 갑니다

[돼지만나러갑니다] 아찔한 동거

by 북드라망 2023. 11. 14.

아찔한 동거

  
어느 날 새벽이생추어리에서 정체불명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돌봄 일지에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보듬이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울음소리는 한 두 명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주 많은 인원들이 호롤ㄹㄹ- 호롤로ㄹㄹ- 하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쉬지 않고 내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쪽에서 무언가 폴짝 뛰는 움직임이 보였다. (헉..!)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무언가가 땅에 납짝 엎드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저기요?) 손을 내밀어 꽁무니를 슬쩍 건드리니까, 폴짝!
   
새벽이생추어리에 개구리가 나타났다. 경칩이 지나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시기였다. 올해 경칩은 3월 6일이고 내가 개구리 소리를 들은 날은 3월 9일이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지 며칠밖에 안 된 날이었다. 개구리는 특히 겨울잠을 깊이 자는 동물이다. 곰의 경우엔 겨울잠 중간에 깨기도 하는데, 개구리는 심장박동과 호흡이 거의 멎는 가사 상태로 겨울을 보낸다고 한다.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자다가 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는 것이다. 요즘은 온난화 때문에 너무 일찍 잠에서 깼다가 갑작스런 추위에 얼어 죽는 개구리가 많다고 한다. 제때 개구리 소리를 듣는 건 점점 귀한 일이 되고 있다.
 
호롤ㄹㄹ- 호롤로ㄹㄹㄹ- ( >경칩 개구리 소리!) 그날 들은 개구리 울음 소리는 논밭에서 익숙하게 들어온 경쾌하고 속이 꽉 찬 소리가 아니었다. 약간 흐물거리는 소리랄까? 근데 깊은 잠을 자다가 이제 막 깨어난 상태라면 그런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목이 아직 덜 풀린 상태에서 기쁨에 겨운 나머지 ‘나 무사히 깨어났다~’, ‘너도?’,  ‘응! 너도?’ ‘이얏호~~’  하며 친구들과 자축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사방에서 끊이지 않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돌봄 활동을 시작했다. 밥을 주고나서 물을 가득 담은 물조리개를 들고 새벽이 물그릇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멀리서 걸걸걸 소리를 내며 새벽이가 뛰어왔다. 나는 물조리개 주둥이를 물그릇에 잘 조준해서 물을 세차게 부었다. 그때! 또 다른 개구리가 물그릇 안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개구리는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물벼락을 맞고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나도 놀라서 바로 물주기를 멈췄다. 개구리는 도망치려고 폴짝 폴짝 뛰어오르는데 물그릇 높이가 높아서 계속 미끄러졌다. 그런 상황도 모르고 새벽이는 정신 없이 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새벽이가 물을 마시는 속도는 상상 이상이다. 마치 모터 달린 펌프로 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나는 혹시라도 새벽이가 개구리를 삼키거나 무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손을 뻗어보았지만 개구리는 내 손에 닿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있는 새벽이는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잠시 지켜보다가 다른 쪽 입구로 가서 새벽이를 간식으로 유인했다. 다행히 물보다 간식이 우선인 새벽이가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그 틈에 물그릇 가까이 가서 개구리의 생사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그 안에 무사히 있었다. 계속 뛰어오르다가 지쳤는지 가만히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나는 안도하며 물 밖으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개구리를 잡아 울타리 너머로 놓아주었다.
 
긴 잠에서 깨자마자 봉변을 당했다면 억울해서 어쩔뻔?

 


 
깨어나는 시간
 

“경칩은 만물이 약동하는 시기로, 움츠려 지냈던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이다.”
- 한국세시풍속사전
 
“이월에는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어린 동물을 기르며 고아들을 보살펴 기른다.”
- 『예기(禮記)』 「월령(月令)」


개구리만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새벽이생추어리의 비인간 존재들은 겨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수와 경칩이 지나고 날이 따뜻해지자 그들은 적당한 때에 맞춰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채색에 가까웠던 풍경이 서서히 초록 빛으로 물들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새싹이 피어나고, 갈색 땅 위로 작은 생명이 올라왔다. 낮이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3/21)이 지나면서 아침 해도 일찍 떠올랐다. 겨울에는 깜깜한 새벽에 지지 않은 달을 보며 아침 돌봄을 가야 했는데 이제는 집을 나설 때부터 환해서 새벽이생추어리에 가서도 랜턴을 켤 필요가 없다. 어느 날엔 평소보다 새벽이생추어리에 가는 길이 더 밝은 것 같았다. 길 옆에서는 무언가 반짝이고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풀잎 위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마디마다 동글 동글 맺혀 있는 물방울들이 빛을 반사하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날씨가 가장 좋다는 청명(4/5)을 지나서는 쇠뜨기가 올라왔다. 쇠뜨기는 새벽이가 즐겨 먹는 야생 식물 중 하나이다. 환삼덩굴, 돼지풀, 칡잎, 곰마리, 쇠뜨기는 새벽이의 최애 간식이다. 이제 새벽이는 식후에 간식 시간을 추가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새벽이의 식사 루틴은 메인 식사 > 미강 물 > 간식 타임 > 루팅 > 식물 채취 코스로 풍성해졌다. “청명에는 부지깽이만 꽂아도 싹이 난다”라는 말이 있다. 새벽이는 이제 매일 땅에서 새롭게 올라오는 식물들을 탐색하고 마당을 산책하며 중간 중간 허기를 달랠 수 있다. 곡우(4/20)가 지나서는 며칠 간격으로 비가 많이 내렸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새 생명들이 기름진 땅에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름이 가까워지면 온갖 식물들이 새벽이생추어리를 뒤덮는다. 새벽이생추어리에 새로운 생명들이 등장하면서 새벽이와 잔디의 움직임도 가벼워졌다. 겨울에는 언 땅을 밟으며 조심 조심 움직여야 했는데 이제는 부드러운 땅 위를 성큼 성큼 걷고, 뛰며 마음껏 몸을 놀리고, 한껏 움직이고 나면 흙바닥 위에 누워 한가롭게 봄볕을 쬔다.
 


 
 
아찔한 동거
 
어느 순간부터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을까? 어딘가 숨어서 조용히 지내고 있을까? 그 때 내가 본 개구리들은 무사할까? 개구리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2세들이 등장했다. 새벽이 집 마당에 있는 개울과 웅덩이에 개구리 알이 많이 보였다. 작고 검은 알들이 여기 저기 빼곡했다. 개울물이나 웅덩이 물은 날이 가물면 마르기도 하고 비가 오면 불어나기도 한다. 어느 날에는 바짝 마른 흙 위에 점점이 밖힌 검은 알갱이 사진이 일지에 올라왔다.
 

   새벽이 마당 한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이 검은 알갱이들.. 뭘까요? 
   검은 알갱이... 개구리 알이지 않을까요?
   아.. 개구리 알일 수 있겠네요..! 아이구 어쩌다가 저 곳에 ㅠㅠ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에도 무언가는 죽고 부패한다. 흙은 죽은 것과 산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서식하는 균류가 사체에 생명을 부여한다고, 린 마굴리스는 말한다. 그녀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존재의 창조적 행위를 칭송한다. 

"동물이 죽으면 균류는 죽은 동물에게 자연의 묘지를 허락한다. 균류를 통해 사체는 풀이나 나무의 거름이 된다. (...) 이것은 사후 영혼이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동양의 윤회설을 떠올리게 한다. 균류는 물질의 윤회를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 균류는 많은 보완적인 성과 난잡하게 유성생식을 하고, 뚜렷한 경계 없이 아무 곳에서나 자란다. (...) 창조하는 동시에 파괴하고, 유인하는 동시에 밀어내고, 착수하는 동시에 전복하는 그들은 대지의 일부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얼마 후에는 무사히 부화한 올챙이들이 개울물과 웅덩이에 가득 찼다. 새벽이가 개울 근처로 가서 움직이니까 가만히 있던 올챙이들이 이리 저리 헤엄치며 꼬물거렸다. 새벽이가 개울 위로 머리를 내밀면 새벽이 머리 모양으로 동그랗게 대열을 형성하기도 했다. 새벽이가 개울 근처에서 오줌을 누면 작은 물길이 만들어지고 오줌-물은 개울쪽으로 졸졸졸 흘러간다. 새벽이의 오줌이 올챙이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개울을 점령한 올챙이들을 보며 새벽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새벽이, 잔디, 개구리, 올챙이, 쇠뜨기, 균류, 그리고 인간 ..... 어쩌면 서로가 그리 달갑지 않을 때도 있을테지만 대지의 거주자들은 자연계의 오묘한 법칙에 따라, 균류가 주도하는 '물질의 윤회'에 참여하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장 속에서, 아찔한 동거를 지속한다.
 
 
여름의 시작
 

“입하 초후에는 땅강아지와 청개구리가 운다. 이후에는 지렁이가 나온다. 삼후에는 왕과가 생한다.“
『국역 유경도익 운기편』, 김은하 편역


입하(5/6)가 지났고, 절기에 따르면 개구리 울음 소리가 곧 다시 울려 퍼질 거라고 한다. 입하의 개구리는 경칩의 개구리와 달리 양기가 충만해지고 생식욕구가 높아져 목청이 대단하다고 한다. 비오는 날엔 지렁이가 흙 밖으로 나와 꿈틀댈 것이다. 작고 귀엽던 새싹들이 폭풍 성장하여 새벽이생추어리를 에워쌀 것이다.
 
양기의 힘으로, 여름의 비인간들이 몰려오고 있다.

 

 

글_경덕(문탁네트워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