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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나우시카, 나르시즘의 불을 꺼라!

by 북드라망 2023. 9. 1.

나우시카, 나르시즘의 불을 꺼라! 


미야자키는 전쟁광?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광인가? 미야자키는 전투기나 탱크와 같은 다양한 무기를 연구하고, 인류의 전쟁사를 공부하는 데에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잡상노트》라고 미야자키가 가끔씩 연재하는 만화가 있는데, 대부분이 전쟁을 준비하는 군인들이 무기를 다루는 에피소드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인터뷰집인 『출발점』에서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미야자키 작품을 전쟁을 다루었느냐 아니냐로도 나눌 수 있다. 《나우시카》,《라퓨타》,《붉은 돼지》,《원령공주》,《하울의 움직이는 성》,《바람이 분다》에는 직접적으로 전쟁이 묘사된다. 하지만 《토토로》,《마녀 배달부 키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포뇨》에는 전쟁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미야자키에게 전쟁이 일상과 똑같은 수준에서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 참 놀랍다. 알다시피 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전쟁을 하고 있는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일본의 경제성장을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전쟁을 생각했다. 


미야자키는 1941년생이다. 2차 세계대전에 돌입했던 무렵에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으므로 호전적인 놀이에 군국주의 찬양은 그 시절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패전 후, 그리고 50년대 60년대 청년기를 거치면서 미야자키는 멋모르고 좋아했던 전쟁에 대단한 부채감을 느꼈다. 자신이 동경했던 전투기 조종사들이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 자신의 조부가 실제로 비행기 제작에 관련된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산을 불렸다는 점이 점점 그 자신을 괴롭혔다. 자신이 좋아한 것, 자신을 좋아해 준 사람이 모두 돌이킬 수 없는 반생명적 행위에 연류되었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 간단히 반성하면 된다. 적극적으로 반전을 외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전투기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전쟁 자체에 대한 호기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미야자키는 자신의 이런 딜레마를 《붉은 돼지》(1992)와 《바람이 분다》(2013)를 통해 두 번이나 문제화하게 된다.  

 

출처 - 다음 영화


《붉은 돼지》는 주인공 돼지-인간을 통해 반파시즘을 선명하게 공표하기에 반전영화처럼 보인다. 한편, 《바람이 분다》는 가미카제 비행기, 제로센의 발명가로 나오는 주인공이 전쟁 자체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기 때문에 친전영화인 듯하다. 이는 미야자키의 분열인가? 그런데 잘 보면, 《바람이 분다》에서 그가 실제로 다룬 문제는 전쟁이 아니다. 《바람이 분다》는 대규모 살육을 무차별적으로 감행할 수밖에 없는 기술문명의 근본적 한계를 직시하는 영화이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전쟁에 대한 자신의 양가감정을 다각도로 해석해보려고 시도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처음으로 전쟁을 문제 삼은 《나우시카》를 주목해보자. 

 


전쟁, 욕망을 가진 자의 숙명 
《나우시카》 이후, 미야자키가 전쟁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라퓨타》는 멸망한 문명국 라퓨타를 되찾으려는 야심가들과 그저 보물 좀 얻으려는 해적단의 싸움을 기본 서사로 한다. 해적, 맘마-유토단은 알록달록한 유니폼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두목을 모시고 라퓨타로 쳐들어가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보물을 얻고 모험을 즐기는 일이지 군대와 싸워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맘마-유토단의 비행선은 천으로 지어진 해적선인데, 해적단의 집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떤 땅에도 매이지 않기에 국적 없이 자유롭다. 아나키스트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라퓨타》의 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대립이 아니다. 해적과의 싸움이니 내전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 두 팀 사이를 라퓨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은 소년 소녀가 통과한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욕망을 거침없이 추구할 때, 전쟁은 일어난다.  


클라우제비츠는 고전 『전쟁론』(1918~1930집필)에서 전쟁을 한다면 두 나라가 서로 대등하다는 증거라고 했다. 똑같은 크기와 역량, 욕망을 가진 두 개의 국가가 희소한 자원을 놓고 다투는 것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식과 달리 미야자키가 그리는 싸움에서는 모습도 능력도 다른 이들이 각자 다른 욕망 때문에 맞선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가 논한 것과 달리, 이것은 2자 게임이 되지 않는다. 욕망이 다 다르기에, 저마다의 이유와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붉은 돼지》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파시스트이기보다는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결단한 한 인간이 전투기로 사람을 웃긴다. 붉은 돼지는 전쟁이란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돼지는 다른 목적 때문에 하늘을 난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붉은 돼지가 기술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싸우거나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멋진 비행기로 아이들이나 여성을 태워 큰 즐거움을 주고 싶다. 돼지의 붉은 비행기는 나무로 되어 있는데, 미야자키는 이 비행기를 지상에 뿌리내리고 살 수밖에 없는 나무의 꿈처럼 그린다. 미야자키가 보기에, 자기 삶의 조건을 다른 높이에서 한번 조망해보고 싶은 비행, 자기가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비행만이 참되다. 붉은 돼지는 자기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나르시스트들이나 전쟁을 하는 거라고 가볍게 비웃었다. 


《원령공주》는 마지막 순간 두 주인공이 서로를 향해 미소짓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말 웃는 장면 하나 없이 엄숙하게 전쟁을 묘사한다. 그런데 이 전쟁도 《라퓨타》에서 그린 것처럼 많은 종들이 각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이는 도처의 투쟁이다. 인간의 왕은 영물인 사슴신을 구해오라 명했다. 그것을 이용해 왕권의 비호를 좀 얻으려 한 불쌍한 사람들이 숲에 불을 놓았다. 그러자 그들 때문에 터전을 잃은 맷돼지가 화가 나 인간을 향해 내달렸다. 살기 위한 전쟁이라지만 인간의 고기로 전락해서까지 살아남을 필요는 없기에, 맷돼지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인간의 총구 앞으로 뛰어들었다. 철을 녹여 살아야 하는 불가촉천민들과 나무 없이는 살 길 없는 동물들이 서로 다른 절박한 이유에서 싸운다. 이것까지만 봐도 단순히 2자 대립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메인 스토리는 또 다른 데에 있다. 숲과 인간의 이 비극적 싸움 속을, 누구에게도 잘못한 일 없는 소년이 사랑하는 숲의 소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다. 《원령공주》가 그리는 전쟁도 인간들끼리의 어떤 이념 대립이 아니다. 전쟁이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해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이들의 몸부림이다. 미야자키는 이 비참을 직시하며, 전쟁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다정한 이가 불을 끈다 
미야자키 전쟁론의 발단이 되는 《나우시카》로 들어가보자. 영화에는 세 개의 국가가 등장한다. 모두에게 위협을 가하는 토르메이카 왕국의 황녀가, 페지테라는 왕국 지하에서 천년 전부터 잠들어있는 거신병을 훔쳐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거신병을 싣고 날기 너무 힘들어 토르메이카 군함이 땅에 추락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람 계곡이다. 황녀 크샤냐는 거신병을 나르기를 포기하고, 바람 계곡을 정복해서 새 왕국 세우기를 꿈꾼다. 왜냐하면 자기야말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유능해서 토르메이카의 황제보다 더 잘 거신병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거신병을 빼앗긴 페지테는 토르메이카로부터 거신병을 되찾기 위해 자기 왕국에 불을 질러 오무를 불러들인다. 여기서 아기 오무를 꾀어 크샤냐 뒤를 쫓게 함으로써, 새끼를 되찾으려는 오무 무리를 바람 계곡으로 유인한다. 이들이 자기 나라까지 태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페지테야말로 거신병을 제대로 쓸 수 있고, 부해를 없애야 하는 선민(選民)들이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옳다! 나야말로 인간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적자(適者)다! 그러니 나 아닌 자들이여 사라져라! 토르메이카와 페지테는 똑같이 자기만 옳고, 남은 틀리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똑같은 것들만 똑같이 싸운다.  

 

《나우시카》는 전쟁의 원인을 나르시즘이라고 한다. 미야자키의 대안은 무엇인가? 《원령공주》에 따르면 전쟁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맷돼지는 실은 인간을 향해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먹이로 전락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자존의 반생명성에 저항하기 위해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자기 존엄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은 감행해야만 한다. 

 

《나우시카》도 전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즉 나르시즘은 지극히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우시카는 나르시즘과 싸우기 위해 자기를 버린다. 나우시카는 매번 눈앞의 그 존재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다 던진다. 자기 욕망과 능력을 돌아보지 않는다. 붉은 돼지가 인간들의 전쟁을 하찮게 취급하고 《원령공주》의 소년이 전쟁 없는 세계를 꿈꾼 것과 달리, 나우시카는 적을 분명히 한다. 그녀의 적은 ‘자기만 옳다’라는 자기중심주의이기에, 그녀의 관심은 오직 타인의 삶으로만 향한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자는 토르메이카인이건 페지테인이건, 거신병이건 오무이건 가리지 않고 살리려고 한다. 나의 삶보다 중요한 것은 너의 삶이기 때문이다. 나우시카는, 고통으로 정신 없이 염산 호수로 뛰어들려는 오무의 새끼를 제 발을 대신 빠트려 막았다. 자기가 아니라 눈앞의 타인을 바라보기! 눈앞의 생명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기! 헌신이야말로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길! 이런 나우시카에 의해 멸망의 전주곡이 멈춘다. 

 

출처 - 다음 영화


나우시카는 부해의 독기로 몸이 굳어 늙어가는 마을 노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 분해되고 정화되어 거대한 생명의 바람을 다시 타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다만 인간만의 삶, 나만의 생을 고집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죽음의 불길은 잡아야 한다. 나우시카는 죽음을 긍정한다. 부해의 힘으로 세계가 더욱 맑고 깨끗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스러진다. 하지만 세계가 스러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을 목적으로 삼는 이는 죽음을 낳고, 죽어가는 온 과정을 긍정하는 이는 생명을 낳는다. 나우시카는 이 역설을 두 팔 벌려 수긍함으로써 ‘내가 최고야’라는 모두의 생각을 내려놓게 한다.  

미야자키는 만화 『나우시카』를 거의 10년 가까이 연재했다. 1994년, 중간에 《라퓨타》,《토토로》,《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붉은 돼지》,《원령공주》까지 몇 번이나 중단되었지만 계속해서 만화로 돌아왔고 결국 작품을 완성했다. 『나우시카』는 이 10년 동안 미야자키의 인간관, 전쟁관, 세계관이 변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대작이 된다. 미야자키는 이 결말에서도 전쟁 자체는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뉴스를 틀면 금방 알 수 있다. 한심한 전쟁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인간은 누구의 정의가 참된 정의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전쟁을 국가 혹은 이념의 차원에서 분석하기보다는 그런 국면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우시카는 선악이 아니라 친절하고 다정한지에 따라 상대를 판단했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따뜻한 마음, 타인을 존중하고 그에 헌신하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나우시카》를 그리면서 맑시즘이라는 굴레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나우시카를 공주로 그렸다 해서, 개봉 이후에 계급 의식이 부족하다는 평도 받았다. 하지만 시시한 사람은 어느 계급에서 태어나도 시시하고, 좋은 사람은 어느 계급에서 태어나도 좋은 사람이다. 노동자라서 올바르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대중은 얼마든지 바보짓을 한다. 나우시카가 공주라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전쟁 자체를 평가하지 말고, 전쟁을 욕망하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나의 옳음을 고집하며 누군가를 향해 화내고 있다면, 거기가 바로 반생명적 전쟁의 불길이 번져 오르는 지점이다. 자기를 내려놓고, 이해하고, 헌신하라.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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