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일단 간다, 모든 곳이 길이기에!

己土 - 평평, 우주의 모든 길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
                                        백무산

그대에게 가는 길은 봄날 꽃길이 아니어도 좋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새하얀 눈길이 아니어도 좋다

여름날 타는 자갈길이어도 좋다
비바람 폭풍 벼랑길이어도 좋다

그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그대는 그곳에 그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일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잔잔한 수면 위 비단길이어도 좋다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이어도 좋다
왁자한 저자거리 진흙길이라도 좋다

나를 통과하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지우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꽃을 들고도 가겠다
창검을 들고도 가겠다
피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가겠다

모든 길을 열어두겠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일 수 없다
길 밖 허공의 길도 마저 열어두겠다

그대는 출렁이는 저 바다의 얼굴이다



대체 ‘그대’가 얼마나 아름답기에 이렇게 기를 쓰고 가시는가. 시의 주인공인 어느 나그네에게 장난스럽게 놀리고 싶었다. 주저 없이 ‘못 먹어도 GO’를 외치는 화자는 마치 사랑에 푹 빠진 청년 같다. “봄날 꽃길이 아니어도” “새하얀 눈길이 아니어도” 개의치 않고 그대에게 달려가겠노라는 이 따끈따끈함(^^).

하지만 상대를 한참 잘못 골랐다. 사실 나그네는 젊은 청춘이 아니라 그 속을 가늠할 수 없는 고수였던 거다. 온몸에 비바람 맞으며 폭풍우를 뚫고 달려가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게 바로 청춘들이 늘 저지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잔잔한 수면 위 비단길”,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 “왁자한 저자거리 진흙길”, 이 모든 길을 한결 같은 강도로 걸어가는 것은 어떤가? 그 일관성이란 젊은 혈기가 폭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내공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詩 속의 길은 첩첩산경(?)이다. 나그네가 가야할 길은 외부로만 뻗어있지 않다. 그것은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투하여 “나를 통과하고” “나를 지우고” “나를 베어버리기”까지를 감수해야하는 그런 길이다. 나 같은 피라미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이나, 흡사 칼날과도 같은 위협에 뒷목이 다 오싹해진다.

나그네는 여전히 말한다. 그래도 좋다고. 거기에 한 술 더 뜬다. “모든 길을 열어놓겠다”고. 이쯤 되면 우리는 ‘아름다운 그대’에 대한 짓궂은 상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화자의 집요한 의지는 그대가 아니라 “가겠다”에 온통 관철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로? 무엇을 위해서?



시를 음미하다가, 학창시절의 어설펐던 내가 생각났다. 현재에 뿌리박지 못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무척이나 고뇌(?)했었다. 이것을 방황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지 않다. 고뇌의 수준은 형편없었다. “나는 무엇을 전공으로 삼아야 하는가?” (방황이 고작 ‘대학전공’이라니-_-;) 하지만 그때는 흔들리지 않고 한 길을 오롯이 파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목표가 확실하게 설정되어있는 그들에게는 삶에 대한 잡다하고 비루한 고민들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은 그런 식의 삶이 재미있을 거라는 환상을 더욱 키웠다. 그러나 착각도 잠시. 학교 문을 나서면서 더 넓은 세계를 만나겠다는 나의 단호한 결의 앞에 펼쳐졌던 것은 아주, 아주 권태로운 일상이었다. 더 이상 한 발짝도 걸어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나는 비겁하게도 과거의 나에게 똑같이 물었었다. “어디로? 무엇을 위해서 가야 하나?”

나에게 己土란 끝없이 펼쳐져있는 평평한 땅이다. 기토를 陰의 土라 하여 작은 텃밭으로 형상화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땅의 크기보다는 땅의 높낮이라고 생각된다. 기토는 산이나 언덕 같은 땅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높이’가 없다. 굴곡진 지형도 다이내믹한 움직임도 없이 오직 저 멀리 수평선만 보이는, 좋게 말하면 평탄하지만 안 좋게 말하면 지루한 平地다. 그런데, 바로 이 지루함이 삶을 닮았다. 다음번에는 그래도 뭔가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동냥질하며 하루를 또 연명하지만, 결국에는 내 발이 뿌리내린 이 밑바닥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먹고 싸고 자기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밋밋함 속에서 뭐라도 찾아보려고 하지만 결국엔 이 밋밋함 자체가 특색이 아닌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탁 퍼져버린 己土 같은 일상.

하지만 이게 기토의 전부는 아니다. 단지 겉모습일 뿐이다. 높이 없이 평평하다는 건 그 땅에 ‘뭔가’가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기토를 평평하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그네가 거치는 다양한 길목들을 보라. 봄날 꽃길, 새하얀 눈길, 여름날 타는 자갈길, 비바람 폭풍 벼랑길, 잔잔한 수면의 비단길,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 왁자한 저지거리 진흙길. 이것들이 결국에는 己土다. 이 하나하나의 것들이 모두 기토가 가진 천 개의 얼굴이다. 양적인 무토는 겉으로 보기에는 훨씬 더 다이내믹해보이지만, 음적인 기토는 잠잠한 표면 밑에서 산보다도 더 깊은 지층을 쌓고 있다. 가만 보면 기토야말로 온갖 것들이 우글우글 거리는, 야단법석한 땅이다. 기토인 사람들을 한번 관찰해보라. 겉으로야 무척이나 평온해보이지만, 속에 기막히고 빤짝거리는 뭔가를 꽁꽁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희한한 기토의 성질 가운데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나그네의 “가겠다”는 외침을 떠올린다. 무엇을 향해 가는가. 어디로 가는가. 사실 그런 목적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내가 굳이 가려고 하지 않아도 지금-여기에서 수많은 것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그네는 지금 ‘어디’로 가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이 땅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사무치도록 이 몸으로 겪고 싶다고 고함치고 있는 것이다. 그 의지가 ‘가겠다’는 언표로 드러날 뿐이다. “모든 길을 열어두겠다 /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일 수 없다 / 길 밖 허공의 길도 마저 열어두겠다” 나그네의 이 외침에 ‘길’이라는 언표마저도 탁 깨어진다. 이 세상 모든 곳이 길이다. 그러므로 길은 분명 있으되, 정해진 길을 찾으려 하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평평하다’는 것의 절대적인 의미가 아닐까? 상대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우리는 평평함의 정도를 알기 위해 땅의 기울기를 측정할 수 있다. 기토가 무토보다 ‘더’ 평평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상대적인 차이들을 모두 한꺼번에 아우르는 상태는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절대적으로 평평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즉, 기토가 평평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매번 똑같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아주 이질적인 것들이 그 속에서 우글우글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것들이 생장수장하게 하는, 썩지 않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최고의 풍요로움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평한 기토는 무언가의 배경일 수 없다. 기토는 길 가는 나그네의 공간적 상관물이 아니다. 기토는 “가겠다”는 말 그 자체다. 나그네는 기토에 세워진 솟대와 같다. 나그네는 지금 높낮이 없는 땅 위를 걷고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계절들, 모든 장애물들, 모든 사랑과 증오를 거치고 또 거치면서 이 땅을 ‘평평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나그네를 계속 가게 하느냐고 물었었다. 하지만 그 힘은 ‘무엇’도 없고 ‘어디’가 없는, 심지어는 ‘그대’마저 꿈꾸지 않는 상태에서 오히려 그 빈 공간에 새롭게 샘솟는 전혀 다른 에너지인 듯하다. 학창시절 내가 상상했던 절박함이란 목화기운 그 자체였다. 뻗어나가고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삶이었다. 하지만 내가 마주했던 일상은 기토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천간의 여섯 번째 스텝, 이미 절반도 더 넘게 와 최초의 추진력이 사그라진 상태, 그러나 늘 새로운 것들이 우글우글한 기토 말이다. 토는 목, 화, 금, 수의 나머지 오행을 그 속에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리한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갈 수’ 있다면 그것은 발생과 성장의 벡터와 동시에 소멸과 응축이라는 벡터가 있는 덕분이다. 목과 화의 세계를 이해한 자가 금과 수로 넘어가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이 해체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결국엔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나를 통과하는 길이어도 좋다 / 나를 지우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기토는 목과 화가 금과 수로 넘어가는 바로 그 길목에 있다. 이 ‘평평한’ 땅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수렴과 재탄생의 단계인 金과 水의 세계로 진입할 수가 없다.



나그네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길을 가는 중이다. 나그네처럼 결연하게 ‘좋다!’를 외치지 않을 뿐이다. 일상은 아무리 좋아도 싫어도 멈춰있을 수가 없고, 우리는 늘 낯선 것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평평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누구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반면 누구에게는 “꽃을 들고도 가겠다 / 창검을 들고도 가겠다 / 피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가겠다”고 고백할 만큼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 그대는 그곳에 그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대는 일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그대’에게 도달할 모든 길을 감수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대가 곧 ‘모든 길’이라는 나그네. 결국 그대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풋풋함에서 시작해 칼날 같은 무시무시함을 지나 온 우주로 폭발하는 시는 지금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모든 단계를 피하지 않고 거쳐 가는 것이야말로 바로 나의 목숨과 우리의 삶과 이 세계에 대한 사랑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삶이 곧 길이라는 말을 시를 통해서 진한 감동으로 다시금 만난다. “그대는 출렁이는 저 바다의 얼굴이다” 기토의 평평함에서 우주의 모든 길들이 출렁인다. 우리의 삶 역시, 평평하게 출렁인다.

_ 김해완(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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