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몸이 내게 내준 숙제, 아픔

우리가 정말 고통을 느끼기는 하는 것일까(2)

 

 

신근영(남산강학원Q&?)

 

신경과 의사이자 뇌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뇌』에서 한 여성 환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우선 그녀가 슬픔에 북받쳐 했던 말부터 만나보자.

 

제 자신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 같아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느끼고 싶지도 않아요. … 이제 사는 데 진저리가 납니다. 이만하면 됐어요.…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삶에 욕지기가 날 정도라고요. 모든 게 다 쓸데없어요. 소용없는 일이라고요.…나는 무가치한 인간이에요. 난 세상이 두려워요. 구석에 숨고 싶어요. … 나 자신을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납니다. 제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저를 위해 이런 수고를 하지 마세요.

ㅡ안토니오 다마지오, 『스피노자의 뇌』

 

이 환자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다. 심한 우울증이랄까……여하튼 그녀는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 대체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환자를 둘러싼 사건이 벌어진 곳은 파리에 있는 살페트리에르 병원이다. 그녀의 나이는 65세고, 그 병원에서 파킨슨병을 치료받고 있었다. 서양 의학에 따르면, 신경질환의 일종인 파킨슨병은 뇌에서 도파민이 제대로 생성되지 않아 생기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몸을 움직이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종종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 여성 환자는, 병을 전후해서 우울증 증상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절망적 상태를 호소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음……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시 궁금해진다.

 

 

고흐 - <비탄>

  

 

숙제를 내는 몸, 숙제를 푸는 머리

 

파킨슨병은 보통 도파민 생성을 돕는 약물을 이용해 치료한다. 하지만 이 약물을 오랫동안 사용하면 약효가 사라지거나, 때로는 원래 상태보다 더 심한 운동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나온 치료법 중 하나가, 아주 작은 전극을 환자의 뇌간에 이식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류를 흘려주면 운동장애의 증상이 마술처럼 사라진다고 한다.

 

우리의 여성 환자는 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치료에 문제가 생겼다. 뇌와 접촉하던 전극 중 한 부분이 원래 자리에서 2밀리미터 아래로 내려갔고, 전류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그녀는 그때까지 의사와 편안하게 나누던 대화를 갑자기 멈췄다. 그러더니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기댔다. 그녀의 몸은 슬픔의 정서를 표현하는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곧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줄줄 눈물을 흘렸고, 그러더니 소리 내어 흐느꼈다. 그리고 이 흐느낌이 계속되자, 그녀는 자신이 매우 슬프고, 절망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으며, 더 이상 살 힘이 없다는 하소연을 했다.

 

이 환자의 모습에 당황한 의사는 그녀에게 왜 그런지를 물었고, 이 때 그녀가 답한 것이 처음에 소개한 그 글이다. 의사들은 곧 전기 공급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전류를 끊었다. 전기가 차단되고 90초 후, 그녀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5분쯤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쾌활하다 못해 장난기 어린 모습을 보였다. 

 

마티스 - <폴리네시아, 하늘>


 

이것이 우리가 읽은, 그 절망적 글이 나오게 된 전모다. 그러니 절망에 대한 그녀의 하소연은 모두 뻥~~이다. (^^;;) 그녀를 슬픔에 몰아넣는 실제적 사건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슬펐고,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런 그녀에게 ‘슬픈 몸’은 하나의 숙제였다. 그리고 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슬픔에 걸맞을 단어들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놀랄 만큼 복잡하게 표현되는 그녀의 슬픔은 실제로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비롯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중요한 사실로서 슬픔의 표현이 완전하게 조직되어 진행된 후에 환자는 그 슬픔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역시 중요한 사실로서, 자신이 슬프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후 그녀는 그 슬픔에 걸맞은 생각을 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질병에 대한 근심, 피로감, 삶에 대한 실망, 절망 등을 말이다.

 

다마지오, 『스피노자의 뇌

 

우리는 흔히 숙제를 내주는 쪽은 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몸이라 여긴다. (이 머리를 보통 ‘의지’라 부른다.) 허나 이 환자의 경우는 반대다. 몸이 먼저고, 머리가 나중이다. 즉, 숙제를 내는 쪽은 몸이고, 푸는 쪽은 머리다. 그리고 여기서 머리는 자신이 받은 숙제를 어떻게든 풀려고 한다. 누구도 이 숙제를 외면할 수 없다. 설령 오답일지라도, 거짓말일지라도, 우리는 몸이 던진 질문에 기어이 답을 찾아내려 한다.

 

‘체험된’ 것과 ‘체험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자,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해보자. 숙제에 맞는 답인지 틀린 답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숙제 그 자체가 뭔지 잘 모르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아주 아주 기막힌 우연이 아니라면, 백이면 백 모두 오답일 것이다. 저번 글에서 만난 폭력 피해자가 이런 경우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연 듯 침범해 들어오는 폭력은 그들에게서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빼앗았다. 그들은 단지 어렴풋이 해결하지 못한, 그러나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가 있다고 느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처한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폭력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넘어져 울고 있을 때,…… [어떤] 부모는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으니까 울지마’라고 말한다. 이처럼 아픔을 아픔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도 있다. 아프다고 느끼는 아이의 감각을 부정함으로써, 혹은 그 감각에 아픔이라는 일상어를 부여하지 않고, 감각의 주체 자리를 부모가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감각은 빼앗기고, 느끼게 하고 싶은 감각은 느끼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이들의 아픔은 소실된다.

 

신다 사요코, 『찾아오는 고통, 부여하는 고통』

 

물론 부모는 아이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걸 거다. 그렇다 해도 아이는, 아프다고 말하는 자신의 몸과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부모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이 상황에서 아이는 부모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고, 그렇게 자신의 감각이 아닌 부모의 감각을 학습한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아이들은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요컨대, 몸이 내준 숙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에바는 케빈에게 올바른 반응을 훈육하려 하지만, 케빈은 무표정으로 거절한다.

 

 

자신에게 ‘체험된’ 것과 자신이 ‘체험해야만 하는’ 것 사이의 괴리감. 이는 비단 사요코가 말하는 아이들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생활에서 어른들이 겪어야만 하는 감정노동은, 아이들의 경우처럼 자신의 몸에 대한 감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호쉬차일드는 감정노동을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기대하는 얼굴표정과 육체적 표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고용인이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도록 요구받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런 감정노동을 대표하는 직종이 서비스업이다. 이 업종에 고용된 사람들은 손님이 뭔 짓을 하든 줄곧 미소를 짓도록 강요받는다. 일례로, 방문 수리를 하는 대기업 기술자들은 서비스가 끝난 후 걸려올 친절도 조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해야 한다. 더욱이 서비스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유연해진 노동시장 덕분에, 항상 윗사람의 기분을 살펴 행동해야 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속에서 우리는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척 연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노동이 오래되면, 자신의 연기에 자신이 속게 된다. 요컨대, 실제로 느끼지 않는 것을 느낀다고 여기거나,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감정노동은 몸의 균형과 몸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그에 대해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와해시킬 수 있다.……사람들은 특정한 감정만을 느끼게 스스로를 훈련시켜 왔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무례하고 성급한 손님들을 대하는 웨이터나 제멋대로인 학생을 다루는 교사는 자신들의 직업적 요구를 수행할 때 침착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혈압을 유발할 수 있는 해로운 생리적 영향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크리스 쉴링, 『몸의 사회학

 

좋은 대학과 직장을 위한 지식만을 먹도록 허락된 아이들. 자신이 체하는지 어떤지도 모른 채, 그것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바쁜 아이들. 그렇게 자신이 느끼는 감각 대신, 부모나 학교가 요구하는 감각들을 학습하는 아이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본주의라는 정글이 요구하는 감각, 즉 회사나 고객을 위해 자신의 감정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밟아버릴 줄 아는 센스를 가져야만 하는 상황. 여기서 자신의 감각과 감정, 몸을 들여다보기 위해 시간을 쓰는 일은 낭비고 사치로 치부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난 이 사회를 ‘무통증 권하는 사회’라고 부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는 나만의 오해일까…….

 

낭비와 사치의 시간을 위하여

 

아픔은 자연스런 현상이며, 머리가 인식하기 전에 몸이 알려주는 일종의 위험신호다. 저번 글에 나왔던 무통증 환자는 이 신호가 고장 난 경우였다. 그는 다리를 절단해야 할 정도로 발이 썩어 들어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사요코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그녀가 주로 상담했던 알콜 중독 환자들에게서 발견한다.

 

중독증에 걸리기까지 환자들이 겪어야 했던 힘든 사건들은 각기 달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몸이 겪었던 고통들에 대한 무감각과 무지가 그것이다. 그들은 몸이 내준 숙제라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이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막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거기서 그들이 붙잡게 된 것이 술이었다. 그들에게 알콜 중독은, 자기 합리화처럼 숙제가 숙제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오답 같은 것이었다.

 

나는 요새 이런 오답들, 그것도 매우 심각한 수준의 오답들을 주변에서 종종 듣게 된다. 일테면, 내 안에 나도 모르는 괴물이 있다고 말하던 성범죄자, 자기 자신조차 이유를 모르고 저지르는 묻지마 폭행들과 살인들, 그리고 자기감정에 무지하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에도 무지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벌이는 잔혹동화들 등등. 이를 막기 위해 법과 치안을 더욱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서 나오지만, 과연 이것이 해결책이 될까. 그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몸을, 그 몸이 말하는 감각을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기 위한 ‘사치와 낭비의 시간’이 아닐까.

 

 

고흐 - <별이 빛나는 밤에>. 내 몸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는 무용한 게 아니다. 이것들의 정체를 탐구하지 않고 외면해버림으로써 얻는 평화는 무감각일 뿐이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나의 신체를 살피자^^

    

  

 

신고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