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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闊步)

오빠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 제이의 눈물

by 북드라망 2012. 8. 21.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오늘은 활보하는 날이 아닌데 제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쩐 일일까?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긴 걸까? 그게 아니고… 가방 정리 하다 보니 교통카드가 없어서… 하루 종일 찾아도 없는데 혹시 못 봤냐고 한다. 제이의 교통카드는 내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어제 활동 끝나고, 제이 집 앞에까지 데려다주고 엘리베이터 문 닫히기 전에 빨리 탄다고 허겁지겁 헤어지는 바람에 교통카드 돌려주는 걸 잊어버렸다. 어 미안, 내일 돌려줄게… 내가 워낙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 내 지갑을 제이 가방에 넣고 집에 오는 때도 있다. 활동을 같이 하다 보면 물건이 막 섞인다. 흐이그… 정신 차려야지… 남의 교통카드를 들고 오다니… 교통카드 찾았으니 다행이다 하면서 전화를 끊으려는데… 제이의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나는 사실, 제이의 목소리를 전화기를 통해 들은 적이 별로 없다. 직접 만나서 얘기한다. 전화를 하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제이로서는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일 몇 시에 만나. 이렇게 약속을 정하면 그대로 한다. 그 사이 딴 말이 들어가면 너무 피곤해진다. 제이는 말 한 마디 하기가 다른 사람보다 두 배, 세 배 힘들다. 뇌병변 장애라서 발음 기관의 근육이 일부 굳어있기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목소리도 작다. 제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제이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종로의 롯데 시네마 앞에서 만나자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종로 일대를 근 한 시간이나 헤맸다. 그래서 간신히 만나 인사를 하는데… 안녕, 난 제이야… 라고 하면서 이름을 말하는데 이 이름 석 자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뭐라구? 뭐라구? 몇 번이나 되물으며 온몸을 제이 입 앞에 갖다 붙여야 했다. 지금은 제이가 하는 말이 잘 들린다. 우리가 얘기를 주고받으며 웃으면 주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자기들은 뭐라고 하는지 모르는 말을 가지고 두 사람이 웃고 떠들기 때문이다.


활동보조 일한 지 일 년이 됐다. 그 동안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귀 알아듣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이가 하는 말을 빨리 알아듣고 제이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것. 다른 사람들은 제이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그저께도 제이는 작업장의 동료에게 “어디 갔다 왔어요”라고 했는데 그 동료는 “아뇨 아무데도 안 갔어요”라고 대답했다. 제이의 말은 자기가 어디(교회 수련회) 갔다 왔다는 말이다. 자기의 근황을 말하면서 동료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것인데, 이 동료는 이번에 여름휴가 어디 갔다 왔냐고, 자기의 근황을 묻는 줄 알고 아무데도 안 갔다고 대답했다. 이런 식의 오해가 늘 생긴다. 그래서 활동보조로서 나의 주된 업무는 ‘통역’이다. 제이의 말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하는 것. 뭐라고 하는 거예요? 제이가 하는 말을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여기에 대답을 해주다 보면, 얘기하기 편하니까, 사람들이 제이의 일을 제이랑 얘기 안 하고 나하고 얘기하게 된다. 그러면 제이는 시무룩해진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제이랑 직접 얘기하라고 하고, 말이 안 통하면 말이 안 통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제이가 도와달라고 할 때만 중간에서 통역만 한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처음에는 하나도 안 들리던 제이의 말이 지금은 잘 들리는 걸까. 제이가 말을 잘 못 하는 거라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알아듣기 힘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장애는 제이가 아니라 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남의 말을 못 듣는 귀를 가진 장애! 그건 귀의 성능이 나빠서가 아니라 들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제이랑 같이 활동을 하면서 나는 이 귀가 좀 뚫린 듯하다. 하지만 요즘도 딴 생각을 하면 제이의 말이 안 들린다. 제이랑 같이 있으면서 나는 종종 내가 해야 하는 다른 일들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아 이것도 해야 하는데, 저것도 해야 하는데, 언제 하지? 이런 걱정에 빠져 있을 때, 같이 있으면서도 제이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강 건너 저편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제이의 얼굴. 이때 제이가 뭐라고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제이는 조금 슬퍼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린다. 내가 이런 저런 생각들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자기와 함께 숨을 쉬기를.

그런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왜 전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제이의 목소리가 울먹이는 걸까… 지금까지 나는 제이가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혼자서 가만히 있을 때도 잔잔히 웃는 얼굴이다. 낙천적이고 솔직 발랄한 그녀가 왜 울먹이는 걸까…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제이는 “오빠가 연락을 안 한다”고 한다. 으이구… 그놈의 오빠, 올 여름 내내 애먹이는구만!



여기서 ‘오빠’는 교회 오빠를 가리킨다. 제이한테는 가족들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이다. 가장 자주 만나고, 얘기도 많이 하고, 같이 놀러 다니고, 교회 모임도 같이 하고, 공부 모임도 같이 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라서 제이네 집의 컴퓨터도 새로 조립해줬다. 그런데 이 오빠랑 얼마 전에 싸웠다. 계기는 사소하다. 오빠 친구에게 통장을 잠깐 빌려주라는 부탁을 제이가 안 들어준 것. 오빠 친구에게 돈 들어올 게 조금 있는데 수급자라서 그런 게 있으면 안 된다. 그러니 그 돈을 제이 통장으로 받아서 그 친구에게 전해주라는 것이 오빠의 부탁이었다. 크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다. 그런데 좀 찜찜하다. 남한테 통장을 빌려준다는 것이 고지식한 제이로서는 개운치가 않다. 그래도 친한 오빠 부탁이니 그러마고 했는데… 근데 이게 여러 가지 상황이 꼬여서 부탁을 못 들어주게 되었다.

통장 사본을 팩스로 보내라는데 집 근처에 팩스 대행하는 데가 없다. 그럼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라고 하는데 집에 있는 스캐너가 고장이 났다. 통장 사본 한 장 보내는 일이 간단해 보이는데 막상 해보니 제이한테는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서관에 가서… 디지털 자료실에 가서… 스캐너용 PC를 예약해서… 스캔을 해서… 이 과정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제이로서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 일이다. 그런데 마침 도서관도 휴관일이다. 날은 덥고 이래저래 짜증이 난 제이는 오빠한테 “못 하겠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오빠는 올 여름 내내 삐져서 말도 안 한다. 전화해도 안 받고, 문자를 보내도 묵묵부답. 교회 모임에서 만나도 얼굴을 외면한다.


말을 안 한다는 것. 그것은 관계의 단절을 뜻한다. 그동안 제이에게는 이 오빠가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오빠가 말문을 닫아버리자 제이에게는 사방이 꽉 막히는 느낌이다. 숨쉬기가 곤란하다. 제이가 집 밖에 나가서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은 주로 이 오빠와 함께, 혹은 이 오빠를 통해서였다. 교회 모임에서도 늘 이 오빠가 제이를 챙겨줬고, 공부 모임(장애 인권강사 아카데미)도 이 오빠가 소개해줘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오빠가 모른 척하니 교회 모임에 나가도 서먹서먹하고, 공부 모임도 지금은 방학이지만 개학을 한다고 해도 다시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제이는 스스로 공언하기를, 공부에 별 흥미가 없다. 그래서 대학에 안 갔다. 지금 공부 모임에 가는 것은 집에 있으면 답답하니까 친구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인권 강사가 되겠다는 것도 장애인으로서 투철한 문제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 “정장 한 벌 쫙 빼입고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 잡고 폼 한 번 잡아 보고 싶어서”라고 제이는 말한다. 물론, 공부를 계속해 나가다 보면 자기 질문을 찾고 스스로 풀어가겠지만 지금은 자발적인 공부의 단계가 아니다. 오빠가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는데, 오빠가 손을 뿌리쳐버렸으니 어떻게 혼자 공부할까 싶은 것이다. 게다가 집의 컴퓨터가 말썽이다. 완전히 다운돼서 아예 부팅이 안 된다. 그런데 이 컴퓨터를 오빠가 조립해줬으니 오빠가 와서 손을 봐주면 좋은데 그게 안 되니 제이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오빠 때문에 하나도 되는 일이 없다. 그건 다시 말하면, 그동안 제이가 오빠한테 너무나 많은 것을 의지했다는 뜻이 된다. 이럴 수가… 오빠와의 냉전이 계속되는 동안 제이는 살이 쏙 빠졌다. 일을 해도 신이 나지 않고, 놀기도 싫다. 시도 써지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한마디로 삶의 의욕이 없어졌다. 오빠가 나한테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었나? 그런데 나는 왜 “통장 잠깐 빌려 달라”는 그 사소한 부탁도 하나 들어주지 못한 거지? 내가 정말 다른 사람 말을 하나도 안 듣는 고집불통이구나… 내 몸 조금 움직이는 거 너무 귀찮아하는 게으름뱅이구나… 이렇게 반성하고 제이는 “내가 잘못했다”며 오빠에게 사과했다. 크게 힘든 일도 아닌데 오빠 부탁 들어주지 못한 것. 더구나 못 할 거면 처음부터 못 한다고 할 것이지, 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안 하겠다고 해서 오빠 실수시킨 점. 정말 잘못했고,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겠으니 화를 풀라고… 제이는 오빠한테 그야말로 ‘싹싹’ 빌었다.

그런데 이 오빠가 이번에 정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냐! 넌 그동안 내 말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어! 오빠는 그동안 제이한테 화가 났던 걸 쫘악 늘어놓는다. 제이로서는 몇 년 전의 일이라 생각도 안 나고, 그게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도 못 해본 일들이 오빠한테는 모두 생생한 분노의 체험으로 되살아났다. 그 중에 가장 최근 오빠를 화나게 했던 일은… 제이가 이 오빠랑 친하게 지내니 제이의 엄마가 “그 친구 사람이 괜찮더라, 한 번 사귀어보는 게 어떠냐?”라고 하셨다. 사귄다? 그게 지금 친하게 지내는 거랑 어떻게 다른 거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제이는 그것도 괜찮다 싶었다. 엄마의 말에 고무되어 제이는 당장 “오빠, 나랑 사귈래?”라는 문자를 보냈다. 이게 사단이었다.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느냐. 그것도 자기가 충분히 고민해서 말한 게 아니라 엄마 말 듣고 장난삼아. 자기를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느냐고 오빠는 화를 냈다. 너 나 좋아해? 좋아하는 사람 말을 어떻게 이렇게 안 들을 수가 있어? 그러면서 어떻게 사귀자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가 있어?

제이는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오빠 말이 다 맞는 것 같다. 내가 다 잘못했어, 다음부터 안 그럴게… 이렇게 사과를 하면서 제이는 어떻게든 오빠와 화해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빠가 “너 그럴 거면 시 쓰지 마!”라고 하는 바람에 제이도 화가 났다.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혀서 어떻게 시를 쓰니? 지금 네가 쓰고 있는 시는 자기 세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르시즘의 독백이야! 오빠의 이 말에 제이는 완전히 자존심이 상해 버렸다. 제이는 멋진 시인이 되는 게 꿈인데 “네 시는 엉터리야” “시 쓰지 마”라고 하니… 이건 완전 사람 앞길 막는 말이 아닌가! 여기에 감정이 확 상한 제이는 오빠한테 사과를 요구했다. 오빠, 내가 잘못한 거는 잘못한 거지만 오빠 방금 한 그 말은 절대 못 받아들이겠어. 오빠가 나한테 잘못했다고 해.


거 봐라, 넌 내 말을 하나도 안 듣는 거잖아! 다시는 나한테 아는 척도 하지 마! 하면서 오빠는 홱 돌아서 가버렸다. 간신히 화해 무드로 들어선 제이와 오빠의 관계는 다시 냉전 체제로 굳어지고 만 것이다. 제이는 오빠를 포기했다. 이렇게 노력해도 안 되면 안 되는 거야. 다시 관계를 회복한다 해도 내가 오빠 말을 다 들을 수는 없어. 다시 그 상황이 된다 하더라도 난 통장을 빌려줄 수 없을 거야. 세상에 사람이 오빠 하나뿐인가? 새로 친구 찾아보자!



심기일전 하기 위해 제이는 교회 수련회에 다녀왔다. 몸이 불편한 제이로서는 어디 가서 하루 자고 온다는 게 쉽지 않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너무 고달파서 어디라도 가서 힘을 좀 얻어 와야 할 것 같았다. 정말, 교회 수련회에 갔다 와서 제이는 활기가 좀 생겼다. 수련회 프로그램 중에 목사님 특강이 있었는데, 특강 주제가 ‘관계’였단다. 사람 사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관계를 좋아지고 나빠지게 하는가 등에 관한 말씀이었는데… 이 목사님 말씀 중에… 이 사람하고 안 되니 저 사람하고 해보겠다는 건 헛수고다. 왜냐하면 이 사람하고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 그러니 내 문제가 뭔가를 보고 고치지 않으면 어떤 사람하고도 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없다… 이 말이 제이에게 완전 팍 꽂혔던 것이다. 목사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이는 오빠와 다시 화해하기로 결심했다.


맞아, 오빠하고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 나는 앞으로 누구하고도 친해질 수 없을 거야! 누구를 만나도 같은 문제에 부딪칠 거야! 그래서 제이는 다시 용기를 내서 오빠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오빠는 계속 전화를 안 받고 문자도 씹는다. 간신히 연락이 닿아서 만나기로 했는데, 언제 어디서 만날지는 “내가 연락할 테니 기다려라” 해놓고 오빠는 아직 연락이 없다. 기다리다 지쳐 제이는 나한테 전화해 놓고 엉뚱한 말 끝에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녀에게 뭐라고 해야 위로가 될까… 오빠, 그 나쁜 놈! 연락 안 오면 고맙지 뭐… 그러게 내가 뭐랬어! 공주병 좀 고치라 그랬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고, 통장 사본 한 장 보내면 될 일을 안 해서 여름 내내 이게 무슨 고생이야! 하려다가 그만두고… 나는 그냥, 그녀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둔다….


_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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