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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조 월튼, 『타인들 속에서』 - 사람의 아이는 혼자 크지 않는다

by 북드라망 2017. 11. 1.

조 월튼, 『타인들 속에서 

- 사람의 아이는 혼자 크지 않는다



사람의 아이는 혼자 크지 않는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기 이상의 수고가 부모의 몫으로 돌아가지만, 한 사람의 성장은 그밖에도 많은 것에 빚을 지게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내 삶이 받아들이고 빨아들인 것의 양을 헤아릴 수가 없다. 그중에는 사람도 있고, 시간과 공간과 경험도 있다. 가깝게는 친척들이 있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달라지던 친구들이 있었다. 선생들이 있었고, 옆집이나 앞집, 아랫집의 이웃들이 있었다. 이사할 때마다 낯설다가 익숙해지던 집들이, 놀이터를 둘러싼 마을의 공기가, 하루 백 원씩 받던 용돈이, 그 용돈으로 사먹을 수 있었던 수많은 과자와 사탕들이 있었다. 수 천 수 만 번 겹쳐진 내 발자국만으로도 길이 났을 법한 어귀 어귀의 골목길들이 있었고, 담벼락이나 울타리 밖 조금은 무서웠던 폐공장터나 으슥한 산길들도 있었다. 



그리고 책이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책이 가장 컸다. 주변의 누구도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내 것이 아닌 사람들이, 내 것이 아닌 곳에서, 내 것이 아닌 시간 속에, 내 것이 아닌 사건들을 무궁무진하게 펼쳐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내게 속하지 않는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정말로 쉬웠다. 읽음으로써, 그 감각과 경험들을 오롯이 내게로 빨려들어오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마법이었다. 그 행위가 배태하는 본질적인 모순으로부터 나는 자발적으로 헤어나올 힘도 의지도 없었다. 현실에서 나는 옷장 속으로 은신해 들어가지만, 그 안에 숨어 읽는 책은 세계를 누비는 모험 속으로 나를 떠나보낸다.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지만, 그 시간동안 품안의 책이 안겨주는 건 비상과 활강의 기쁨이다. 나는 순전한 유희로써 책을 읽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선생처럼 나를 가르쳤다. 과학을, 언어를, 예의범절을, 인간관계의 기묘하고 이상야릇한 역학들을.  


그중 최고는 물론 SF였다. 최소한 나한테는 그랬다. 이 장르의 소설들은 우리 세계의 상식적인 사실들을 한 조각도 당연히 여기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산소, 물, 하나의 태양과 인간의 인간 됨과 두 다리의 보행과 공룡의 멸종에 이르기까지, 그 세계에서 도전받지 않을 진실이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당연한 것들이 새삼스러운 물음표 앞에 벌거벗겨지고, 제약을 벗어난 상상력은 뜻밖의 방향으로 치달아간다. 열 다섯 혹은 열 일곱,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지만 결국은 이쪽 책상에서 저쪽 책상으로 옮겨 다니는 게 운신의 최대 범위였던 암울한 시절, 이 자유분방하고 발칙한 세계에 매혹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인들 속에서』의 주인공 모리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1979년 현재, 영국의 기숙학교 알링허스트로 학기 중간에 전학해 들어온 열 다섯 살짜리 웨일스 소녀에게 세상은 조금도 친절하지가 않다. 지역도 학교도 낯설 뿐 아니라, 아이들은 심술궂고 적대적이고, 방학 때 돌아갈 집조차도 더 이상 ‘내 집’이 아니다. 모리가 평생 아끼고 사랑했던 원래의 가족은 완전히 망가져버렸기 때문이다. 작년에 모리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일란성 쌍둥이 자매 모르(모르가나의 애칭)가 죽었다. 모리는 살아남았지만 크게 다쳐,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끝없이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사실 모리와 모르의 엄마는 마녀다. 작년의 그 교통사고도 엄마가 일으킨 것이었다. 악의 여왕이 되려는 엄마의 획책을 자매 둘이 막아보려 애쓰다가 그 사달이 났다. 사고 이후 모리는 평생 만나본 적도 없었던 아버지 다니엘에게 인계되었고, 아버지와 세 고모는 모리를 이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터전이 바뀌고, 친구들을 잃고, 새로운 집단에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마녀’ 어머니를 경계하고, 서먹한 아버지를 낯설어하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제 변형된 신체에 적응해 가는 것. 좌절의 한복판에서도 유년의 꿈으로부터 희망을 펌프질 해 올리는 것. 어떤 면에서 이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청소년기의 초상과도 같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도 1979년 영국을 배경으로 각색하면 딱 이 비슷한 그림이 나올 것만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다닌 학교는 알링허스트가 아니었지만, 거기서 만난 또래집단도 이 학교의 소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 어딘들 다를 수 있을까. 영악한 청소년들은 계산적인 얼굴로 속물근성을, 야만적인 얼굴로 잔인성을 불규칙하게 드러내곤 한다. 엄마가 마녀라는 이야기도 그렇다. 안 그런 엄마의 수만큼 많은 엄마들이 그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녀들은 불가해하게 타오르는 사랑으로 자녀들의 무력한 영혼을 휩쓸어버리기 일쑤다. 조종하고 억압하기 위해 눈망울을 까뒤집는 그 사나운 얼굴 앞에서, 안 그래도 한창 자의식 비등한 청소년 자녀가 ‘마녀’ 이외 다른 어떤 호칭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런 반면 아빠들은 평생을 한 집에서 살아온 게 무색하게 타인처럼 데면데면하기 일쑤고, 나 자신의 변해가는 외모가 어색하고 불편해도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십대 후반,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나이. 유년의 자아를 죽은 쌍둥이라도 되는 양 힘들게 뒤로 남기고, 성인으로의 발돋움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 모리의 모든 이야기가 나 자신의 청소년기에 관한 웅변적인 우화로 다가오는 가운데 이제까지의 동질감에 쐐기라도 박을 기세로 SF가 등장하니, 내 마음 속으로 이런 목소리가 설핏 흐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 얘랑 나랑 진짜 너무 똑같은 거 아니야?‘   


모리는 SF의 열렬한 독자다. 엄마는 사악한 마녀이고, 자기 자신은 유령을 보며, 요정과도 대화할 수 있는 이 진지하고 우울하고 불행한 소녀에게 SF는 유일한 숨구멍, 매달려 숨돌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구명줄과도 같다. 순수한 자유시간은 물론, 짜낼 수 있는 모든 막간의 막간을 통틀어 모리는 탐욕스럽게 SF 작품들을 읽어치운다. 주변의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던 장르에 대한 열의, 외롭게 사랑해온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 홀로 탐닉하던 작품에 대한 진지하고 열정적인 논평이 모리의 목소리로 흘러나올 때, 자, 대한민국 어느 SF의 팬이 영혼에 튀는 스파크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엄밀히 말해 이 작품은 SF가 아니다. 과학 대신에 마법이 나오고, 화성인 대신에 요정이 나오며, 우주선이 멋지게 웜홀로 이동하는 대신 망자들이 숲속으로 음울하게 행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F를 말하는 자리에서 이 책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건, 나아가 ‘내 사랑하는 인생소설’이라 칭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건, 이것이 정말로 외로운 책벌레 SF 팬의 인생 이야기 그 자체로서 내가 살아낸 버전의 이야기를 반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고 책을 읽던 시절이 있다. 스페이스 오페라 꿈을 꾸고 싶어서 밤마다 불을 끄고 우주선 생각에만 골몰하던 시절도 있다. 요정과 대화하는 재주는 없어도, 내 나름의 은밀한 환상에 기대 일상을 견뎌냈던 시간들이 있었다. 엄마가 마녀였던 시절이 있었다. 내 일부가 죽어 없어지던 순간들이 있었다. 상처입고 망가질 뻔하다가 책에서 길을 찾던 고비들이 있었다. 행복한 시절은 아니었다. 나는 그 시절을 생존자의 어두운 감각으로만 기억해왔다.


그러므로 『타인들 속에서』가 되살려준 것은 그때의 외로운 서사만이 아니다. SF에 대한 사랑이나 동류의식만도 아니다. 모리는 SF 속에서 막연한 이정표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 길목마다 발 내밀어 디딜만한 지반을 가리켜준 건 책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모리의 삶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거나 가볍게 스쳐지나가면서, 무심히 호의를 베풀어주던 사람들 말이다. 학교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여러 선량한 사람들. 실제 모리가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적응하고 제 자리를 만들어갈 힘을 만들 수 있게 해준 것은 책 자체보다는 책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이 건네는 가볍고 무심한 호의들이었다. 그런 호의는 비장함 없이 가볍고 사심 없이 따뜻하다. 그 뭉클한 온기가, 청소년기의 우울한 길목에서 나를 견인해주었던 것들, 잠깐씩 버티게 해주었던 것들, 더 나은 쪽으로 방향 틀게 슬쩍 밀어주던 것들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다. 크고 굵직굵직한 덩어리 사이사이, 작은 기억들이 튀어 올랐다. 그것은 온통 중요하다 생각해본 적 없는 누군가의 얼굴들이었다. 행인 1, 2, 3 정도로만 뭉개져있던 희미한 형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두상이, 얼굴이, 미소띤 표정들이 하나 둘 단단하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아이는 홀로 자라지 않는다. 성인의 문턱이며 정글 속 생존싸움과도 같은 한 시기, 청소년기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삶을 성형해내는 무수한 요소들 중에는 책도 있고 사람도 있고, 전학 간 학교의 텃세와 갓 구운 빵 냄새, 도서관의 상호대출제도, 요정과 나누는 우정이 있을 수 있다. 죽은 쌍둥이 자매의 기억, 마녀 엄마의 사악한 저주, 오래된 공장터의 을씨년스러움, 커피 맛이 형편없는 카페만큼이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수학의 정석 집합 부분, 돈까스 급식, 기숙사의 점호 벨소리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라도, 따뜻이 다가와 주던 이름 없는 얼굴들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나는 내 기억을 더듬을 때 까맣게 놓치고 있던 그 사실을, 모리를 지켜보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나도 힘들게 발돋움하던 순간들에, 뒤꿈치 아래 무심히 디딤돌을 괴어주던 친절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은 지워진 채 미소로만 남은 사람들. 어쩌면,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조건 없는 호의야말로 우리 삶에 상존하는 강력한 마법일지도 모르겠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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