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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서당개삼백년

강함剛, 거울같은 마음

by 북드라망 2017. 10. 25.

강함剛, 거울같은 마음


子曰 吾未見剛者. 或對曰 申棖. 子曰 申棖也 慾 焉得剛.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 강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대답하였다. “신장(申棖)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신장은 욕심이 있는데 어떻게 강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 10장 -


= 한자 풀이 =

= 구절에 관한 주석들 =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나라면 누구에게든 친절한 사람이라고 할 것 같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노인들은 나를 편히 여기고, 친구들은 나를 신임하고, 젊은이들은 나를 그리워하게 하고 싶다.”(「공야장」편 25장) 젊은 사람부터 나이 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르고 싶어한 공자. 실제로 공자는 국적, 신분, 나이를 뛰어넘어 무수히 많은 제자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했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위치를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꽤나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공자처럼 다양한 관계의 스펙트럼을 감당할 자신은 없다. 누구와도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혔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에겐 사귀길 꺼려지는 인물유형이 있다. 아직 경험이 적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그동안 난 사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난 게 아닐 수도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사람을 사귀었던 것이다. 왜? 이 익숙한 범위를 벗어나버리면 바로 불편해지니까. 모두를 포용하는 척했지만 난 사실 나와 비슷한 사람만을 허용하는 쫌생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외유내강(外柔內剛). 겉은 부드러우나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가진 사람에 대해 쓰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강(內剛), 내면의 단단함이다. 강하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나 목표의식의 확고함은 아닌 것 같다. 신장에 대한 공자의 평가를 보자. 아마도 신장은 흔히 말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하지만 공자는 신장을 두고 욕심(慾)이 있다는 한 마디로 일축한다. 욕심이 있으므로 강할 수 없다는 것. 사량좌의 주석에 따르면, 강한 것은 외물을 이기는 것이고, 외물에 흔들리는 것은 강한 것이 될 수 없다. 즉, 강함이란 내가 맞닥뜨린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의연한 것이다.


동양사상에서는 종종 성인(聖人)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다. 거울은 더러운 것, 모난 것 모두를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비춘다. 성인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성인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왜곡됨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떠나가면 다시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회복한다. 따로 고집하는 것도, 배척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어떤가? 내 마음대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대상이 떠나가도 여전히 그것을 상으로 붙든 채 후회하고 갈망한다. 대상이 있든 없든 내 마음은 항상 요동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고요함으로 사물에 응하는 게 아니라 계속 외물을 소유하려 하고 끄달리는 시끄러운 마음의 상태. 마음이 외부의 상태에 따라 계속 흔들리는 것, 이게 바로 욕심이다. 그러니까 욕심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시끄럽고, 마음이 시끄럽다는 건 자기가 자기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는 얘기다. 때문에 욕심이 있으면 강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강함을 자기고집이 세고 주관이 뚜렷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무언가를 고집한다는 것은 그것에 예속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상태에서는 마음이 늘 부자유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집함 없이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강함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보면 “노인들은 나를 편히 여기고, 친구들은 나를 신임하고, 젊은이들은 나를 그리워하게 하고 싶다.”는 공자의 바람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나의 바람과는 다르다. 공자의 바람은 자기규정성을 버린 상태에서 사람들과 관계 맺고자 하는 능동적 욕망의 발로지만, 나의 바람은 내가 생각하는 편안함과 좋음과 이익을 고수하려는 수동적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자의 유(柔)는 강(剛)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나의 유(柔)는 욕심(慾)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관계가 어그러지면 나와 맞지 않는 그 사람을 탓하고, 원하는 사물을 소유하지 못할 때는 그런 상황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나 상황이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에서 문제를 찾으려는 나의 나약함이 아니었을까? 강해지리라. 우선은 내 마음의 거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얼룩을 닦는 것부터.


글_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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