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친절한 강의 중용』 - 어떻게 살 것인가?

 『친절한 강의 중용』 - 어떻게 살 것인가?



맹자』를 보면 ‘왕척이직심’(枉尺而直尋)이란 말이 나옵니다.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겠다’면서 무도한 세상에 벼슬하러 나간다는 겁니다.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약간의 편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맹자는 말도 안 된다고 일갈합니다. 자신을 굽히고서 세상을 바로잡을 사람은 없다는 거죠. 자신과 세상을 기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참 민감하긴 합니다. 선조 때 율곡 선생은 그래도 한번 해볼 만한 세상이라고 봤고, 퇴계 선생은 이건 안 될 세상이다 해서 안동으로 내려간 거잖아요. 이렇게 판단이 엇갈릴 때가 있습니다. 시대에 대한 상황인식과 나아가고 물러나는 ‘진퇴’의 문제는 항상 논란이 있어요. 숙종 때도 다른 사람들은 무도한 세상이라고 봤는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생은 나가서 벼슬하셨습니다. ‘어떻게든 해봐야 하는 때다!’ 생각하신 거죠. 그러니 처세가 참 어렵습니다.


- 우응순, 『친절한 강의 중용』, 92쪽


‘처세’라는 말의 뜻 그대로를 보자면 ‘사람들과 사귀어 나가는 일’이다. 여기에 조금 더 의미를 보태어 보자면, ‘세상에 대한 태도’ 쯤 된다. 그러니까 말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헌데, ‘처세’가 대체로 통용되는 용법은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는 기술’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 조롱하고 싶어서 그랬을게다. 위의 인용문에 언급된 훌륭한 인물들 말고, 역사상에는 뇌물을 받냐마냐, 권력을 더 갖느냐 마냐를 놓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양반들이 있었을테고, 백성들은 양반들의 고상한 언어 ‘처세’로 그들의 위선을 조롱했던 것이 아닐까? 그게 굳고 굳어서 이제는 ‘처세=아부’가 되어버린 것일테고.




다시 ‘처세’의 본래 의미로 돌아와 보면, 말 자체의 요지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 항상 그렇지만, 이런 질문은 질문 그 자체가 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질문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삶은 언제나 ‘이미 일어난 일’로 앞에 있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 보자면, 그것은 ‘나’의 의지와도 별로 상관없이 일어나고 만다. 그러니까 ‘질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던지는 것이 아니고 항상 일어난 것으로 향한다. 다만, 의식의 습관으로 생략될 뿐이다. 


대개는 이런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는 생략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냥 산다’. 이 중요한 질문을 어째서 던지지 않게 된 것인가? 그건 어느샌가 나의 질문, 또는 내가 할만한 질문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은 비장한 각오로 세상을 바꾼자라거나, 또는 적들에 맞서 어떻게 ‘나’와 ‘우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식의 큰 담론들 하고만 관계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나완 별로 관계가 없는 질문인 것 같다. 


우리 시대가 무도(無道)한 시대가 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아무도 자신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삶은 욕심에 뒤덮혀 있다. 이걸 갖고 싶고, 저걸 갖고 싶고, 더 많이 갖고 싶고, 더더 많이 누리고 싶다는 소유욕에 끌려가는 삶이다. 요약하자면 꽃에 뒤덮여 길이 사라졌다.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것은 물욕, 소유욕으로 뒤덮힌 마음에 길(道)을 내는 도구와 같다. ‘아차’ 싶은 때, 꺼내어 물어야 한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건 다음 문제다. 그러니까 자기 삶의 교정능력, 요즘 말로는 회복탄력성은 아마 그런 식으로 커질 것이다. 사소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한번씩 꺼내어 자신에게 물어보자. 돈드는 일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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