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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케루악, 『길 위에서』 - 누구나 가슴 한켠에 '젊음' 하나쯤은 있는 법

by 북드라망 2017. 8. 14.

잭 케루악, 『길 위에서』

- 누구나 가슴 한켠에 '젊음' 하나쯤은 있는 법


나는 더 젊어지고 싶다거나, 나이를 먹기 싫다거나, 젊을 때가 더 좋았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5년 전, 10년 전, 15년 전, 20년 전을 떠올려보면 '으악'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들부터 먼저 생각난다. 딱히 그 시절의 행동들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어떨까?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부끄러울 법한 그런 짓들을 안 할까? 아마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짓을 하고, 나중에 똑같이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도저히 젊어지는 걸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 차라리 '노인'이 되고 싶을 정도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나는 '나의 젊음'을 감추고 싶다. 


_ 이른바 '비트세대'의 대표적인 작가, 잭 케루악(표지 사진 속 인물). 잭 케루악의 사진은, 역시 '비트세대' 작가 앨런 긴즈버그가 찍었다.



여기에 전설적인 소설이 한편 있다. 한국어판 기준으로 해제 빼고 488쪽, 처음 작성된 원고 기준으로 36미터. 케루악은 이 소설을 3주만에 썼다. 36미터인 이유는 타이프 용지를 이어붙인 '두루마리'에 썼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소설은 '전설'이 되었을까? 야구든, 축구든, 소설이든(읭?) '전설'이 되는 길에는 대략 두가지 경로가 있는데 짧은 기간일지라도 당대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거나, 아니면 평균이 넘는 성과를 평균적인 기간 이상 동안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다. 『길 위에서』는 전자의 방법으로 '전설'이 되었다.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것이 만약 단순히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만 했다면 '전설'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현실적 '영향력'이 필요한데, 『길 위에서』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결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케루악은 '길 위에서' 당대의 '젊음'들과 시끄럽게 공명한다. 이 '공명'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1960년대 그 유명한 '히피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야기의 골자는 간단하다. 화자인 샐과 딘은 동부 뉴욕에서 미국 서부를 찍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한다. 이 '길 위에서' 이들은 여러 '젊음'들과 마주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진다. 이 과정들에 대한 묘사가 끝없이 이어지는 데, 길 위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 끝없는 '묘사'는 그 자체로 '젊음'을 보여준다. '길'은 어떤 공간인가? '이동'하는 공간이다. '젊음'은 어떤 때인가? '이동'하는 때이다. 따라서 젊음은 길 위에 있다. 다시 한번 '길'은 어떤 공간인가? 멈춰 있지 않은 공간,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행의 공간이며 결국엔 '불안'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일에 대한 대책 또한 없다. '계획'은 세우나마나 어그러지고 만다. '주변'으로 빠지지 않고 안정이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끝'까지, 한눈팔지 않고 갈 힘이 '젊음'에게는 없다. 


그래서 소설은 내내 '불안정'하다. 화자와 주인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한다.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하고, 섹스에 몰두하고, 재즈에 미치고 발광하고……. 왜 그러는 걸까? 적당히 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광기'에 가까운 그런 짓들은 '불안정'을 이기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도무지 좋은 대학에 갈 희망이 안 보인다. 매일매일이 불안하다. 어느날 끝내주는 음악을 들었다. 불안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이 끝내주는 음악에 몰두한다. 음악을 듣는 그때야말로 '불안'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더더욱 몰두한다. 참고서를 팔아서 기타를 사고, 문제집 살 돈으로 악보를 산다. 멈추면 '불안'하다. 이 청(소)년은 나름대로 '불안감'을 옆에 두고 사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걸 두고 '그건 '도피'지. 희망을 찾으려면 '공부'를 해야지'하는 것은 '어른'들이나 하는 말이다. '공부'는 하는 내내 불안하지만, 적어도 음악은 하는 동안은 불안하지 않으니까. 이게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윤리적으로 좋은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았다는 점에서는 좋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불안'을 옆에 두는 이 과정을 익히는 것이 정말로, 진짜로 중요하다. 


_ 50년대 '비트' 문화는 60년대 '히피' 문화로 이어진다.



샐과 딘은 목적지에 도착했을까? 서부를 찍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으니 '도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 장면이 중요한데, 샐과 딘은 마지막에 헤어진다. 딘은 다시 대륙을 횡단하려고 한다. 반면에 샐은 잘 차려입은 친구들과 듀크 앨링턴의 콘서트 장으로 향한다. 다시 '길 위'로 나서는 딘과 길의 끝에 남으려는 샐이 극적으로 대조되는 장면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젊음'은 여기서 끝이 난다고 해야 할까? 딘을 통해 나는 '젊음'에 갇힌 '젊음'을 보았다. 샐을 통해서는 '젊음'을 마음 속에 품은 '젊음'을 보았다. 딘에게 '도착'은 '도착'일수가 없다. 그에게는 어디든 '통과점'이다. '삶이 곧 길이니까'. 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도착'은 '도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 차이가 있는데, 딘에게는 모든 '점'들이 '통과점'의 연속이라면, 샐에게는 '도착점'의 연속이 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갇힘'과 '품음'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이것이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길 위에' 있다. 이 말인 즉, 인생에서 '불안'을 지울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늙어도 초라해져 버린 '젊음' 하나씩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셈.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조금 아쉬웠다. 지금보다도 어릴 때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샐과 딘처럼 막가보지는 않았지만, 참고서도 팔아봤고, 문제집 삥땅도 쳐봤고, 그 돈으로 기타도 사보고, 악보도 사봤다. 가출은 별로 할 필요가 없어서 안 해봤지만, 지금이라도 부모님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무수한 탈선의 기록도 있다.(아, 부끄럽다) 그 모든 바보짓들이 여전히 가슴 한켠에 있다. 가끔 설레는 일을 만나 가슴이 두근거리면 그것들이 두근거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리면 여전히 부끄럽다. 그래도 그것들을 가끔씩 꺼내보곤 한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에는 막 나가야 하는 순간들이 있는 법이니까.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 잭 케루악,『길 위에서』2권,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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