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희노애락의 우주적 스케일, '중(中)'과 '화(和)'가 지극해지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란다.

by 북드라망 2016. 6. 30.


중() 화()



희로애락이 아직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한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희로애락이 일어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發而皆中節 謂之和)
‘중(中)’은 천하의 근본이다.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화(和)’는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중(中)’과 ‘화(和)’가 지극해지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란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용 1장은, 하늘이 부여한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고 그것은 교(敎)에 의해  지켜진다는 첫 구절로 시작해서, 희로애락과 천지만물의 관계를 말하는 이 구절로 끝난다. 중용을 처음 읽었을 때 이 구절이 참 놀라웠다. 문맥으로 보아서 ‘중(中)’과 ‘화(和)’가 지극해진다는 의미는 감정을 잘 관리한다는 말인 듯한데,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란다는 것을 감정관리와 연결시키다니 입이 딱 벌어졌던 것이다. 벌컥 벌컥 화를 내거나 슬픔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말라는 이야기를 우주적 스케일로 하시다니!

아, 이것은 우주적 스케일의 감격!!


이 구절은 감정의 대단한 힘을 포착한 것이다. ‘중(中)’과 ‘화(和)’가 지극해지면 천지만물이 제대로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천지가 뒤죽박죽이 되고 만물이 모두 죽어버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감정은 힘이 세다! 천지만물까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때때로 제동장치가 풀려버린 자동차처럼 마냥 내달려 버리기 일쑤여서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감정은 고통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노여움과 슬픔은 그것에서 좀체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고통스럽고, 기쁨과 즐거움은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서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기쁜 감정조차도 결국 고통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은 감정이 욕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욕망은 신앙이나 이성에 대비해서 사악한 것이었고, 신의 뜻을 거스르는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그래서 욕망은 언제나 극복이나 정화의 대상이었다. 욕망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은 근대까지 이어져서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동물성으로 파악된다.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욕망을 동물의 정기와 다름없는 것으로 파악했고, 반드시 정신의 통제아래 둘 것을 주장했다. 동아시아 유학의 전통에서 사욕(私欲)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사람은 주자다. 주자가 제시하는 군자의 상은 사사로운 욕망과 지난한 대결을 벌이는 자다. 주자에게 사욕(私欲)은 이치에 반하는 것이지만, 욕망일반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군자의 신독(愼獨)은 자신의 욕망이 사욕(私欲)인지 아닌지를 부단히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성의 힘을 동원하든지, 신독(愼獨)을 하든지 잘 단속해야 될 것이 감정이라는 데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일치하는 것 같다.

주자는 “희로애락이 아직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희로애락이 아직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태란 치우침이 없는 것이니 성(性)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이 주석은 그 자체로는 정(情)이 성(性)에 포함되는 것인지 아닌지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주자가 성(性)은 곧 이치라고 했으니, 함부로 날뛰기 쉬운 정(情)이 성(性)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희로애락이 아직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태”가 정(情)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고도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조선에서는 인간의 성(性)에 정(情)이 포함되느냐 아니냐를 두고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 있었다. 모든 어긋남의 근원을 사욕(私慾)으로 부터 찾은 주자로서는 정(情)이 아직 마음에서 일어나기 전에는 성(性)과 같다는 주석의 근거를 “중(中)은 천하의 근본이다”라는 구절에서 찾은 듯하다. 그에게  천하의 근본이 의미하는 바는 이치, 곧 치우치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에게 화(和)는 감정이 일어나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다. 감정이 이치에 합당하게 발현되면 화(和)가 된다. 하지만 화(和)가 단지 이치에 맞는 감정의 발동이기만 하다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란다”라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문장과 너무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개개인의 마음이 천지만물에 연결되어있으니, 감정에도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천명에서 시작해서 만물이 생겨나는 장대한 우주적 드라마가 어쩐지 쪼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게다가 “희로애락이 아직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태(喜怒哀樂之未發)”는 치우침이 없는 것이라고 딱 못을 박는 것도 별 근거는 없는 것 같다. 아직 마음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치우침이 있는지, 치우침이 없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사는 왜 희로애락과 천지와 만물의 생성을 연결해서 이야기 한 것일까? 희로애락이란 타자와 만나서 일어나는 만남의 감응이다. 희로애락을 말하면서 천지와 만물을 이야기 한 것은, 천지만물도 서로 만나야 비로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니, 만물의 생육을 말하기 위해서는 만남의 감응을 이야기해야 했던 것 아닐까? “희로애락이 아직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태(喜怒哀樂之未發)”인 중(中)은 아직 어떻게 정(情)이 일어날지 형태를 갖추지 않은 미규정적 상태다. 하지만 정(情)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성, 곧 능력일 것이다. 중(中)을 천하의 근본이라 한 것은 치우침이 없어서라기보다, 정(情)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자 잠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능력이 없다면 만나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만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보아도 보지 않은 것이요, 만나도 만나지 않은 것과 다를 게 뭐가 있으랴. 그러니 감(感)할 수 있는 능력, 정(情)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인 중(中)은 천하의 근본이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생길 수 없고, 아무것도 자랄 수 없으니, 위대한 근본이다.

만나 감응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생기지 않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감(感)할 수 있는 능력, 정(情)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인 중(中)은 천하의 근본이다.


희로애락이 일어나서 절(節)에 맞는 것이 화(和)다. 중(中)이 타자와의 마주침에 그 마주침을 느낄 수[感, 감] 있는 능력, 다시 말해 정(情)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라면, 절(節)에 맞는다는 것은 정(情)에 요구되는 조건이다. 뭔가가 생성되는 조건에 부합하는 것, 혹은 뭔가를 생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화(和)다. 타자와의 마주침은 좋은 마주침도 있고 나쁜 마주침도 있다. 하지만 좋은 마주침이나 나쁜 마주침이라는 것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감정인데, 절(節)에 맞는 감정이란 그것을 억누른다는 말이 아니다.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고, 지나치게 화내지 않고,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정이 절(節)에 맞을 때의 효과인 것이지 치우치지 않는 것이 곧 화(和)는 아니다. 오히려 화(和)는 나쁜 마주침조차 뭔가를 낳을 수 있는 마주침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나는 그대로 있고 상대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상대를 참고 수용하기만하는 것도 아니다.

(和)에는 국의 간을 맞춘다는 뜻도 있다. 국에는 여러 가지 맛을 내는 재료가 들어있어서 때로 그 맛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국의 간을 맞춘다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맛들을 잘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다. 어우러지게 한다는 것은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 맛은 이도저도 아닌 맛이 되고 말 것이다. 무와 물과 멸치와 간장의 단순한 조합이 국이 아니고, 무국이라는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이 어우러짐이고, 절(節)에 맞는 것이다. 어우러짐이란 각각의 요소들이 자신의 옛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가 되는 조건, 즉 절(節)에 맞추는 것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은 때로 나에게 독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예측불허일 터, 화(和)는 이런 예측불허의 마주침을 잘 끓인 국이 될 수 있도록 간을 맞추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독기를 품은 마주침이었다면, 그 독을 최소화시켜서 오히려 약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화(和)다.

주역(周易)에는 혁(革)괘라는 괘가 있는데, 혁명이라고 할 때의 혁(革)의 의미가 여기서 나왔다. 혁(革)괘는 아래에 불이 있고 위에는 물이 있는 형상이다. 이 괘가 혁(革)이 되는 것은 위로 치솟는 불과 아래로 흐르는 물이 만나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물은 불을 덮어서 죽이고, 불은 물을 말려서 죽인다. 서로가 서로를 멸할 수 있어야 비로소 새로움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 어느 쪽도 죽지 않으려 하거나, 한쪽만 죽는다면 새로움은 나오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멸해서 이전의 형체가 없어지는 무규정성의 지대, 그것이 중(中)이자 생성을 위한 태(胎)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중(中)은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中)의 상태는 이미 일어난 정(情)을 죽임으로써도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정(情)을 죽인다는 것은 어제까지의 나를 죽이는 것이다. 어제까지의 나를 죽이는 것이 바로 감(感)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잠재성인 중(中)에 이르는 것만으로 새로움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잠재성 속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화(和)의 능력, 다시 말해 절(節)에 맞게 동(動)하는 능력이 결합되어야 존재가 생성될 수 있다. 채운의 말대로 이것이 ‘감-동(感-動)’, 존재의 생성이다. (채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그러니까 ‘중(中)’과 ‘화(和)’가 지극해진다는 것은 ‘감-동(感-動)’, 존재의 생성을 말한다.

잠재성인 중(中)에서 다시 솟아 오르는 화(和)의 능력(감하고 동하는)이 결합해야 존재가 생성될 수 있다!


‘중(中)’과 ‘화(和)’가 지극해지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란다.‘ 이 구절은  개체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individual) 자기 동일성의 최소단위로 이해한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동일성으로 똘똘 뭉쳐진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무엇이 선험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함께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생성과 그 생성의 감응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성의 감응을 느끼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개체는 자기 동일성으로 먼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개체와 개체가 함께 죽어서 다른 개체로 태어나는 개체화의 효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쉼 없는 생성의 과정인 생생불식(生生不息)의 과정에서 생(生)과 생(生)사이에는 사(死)가 있는 것이고, 개체는 순간순간 ‘감-동(感-動)’의 효과로 드러나는 생(生)인 것이다. 3월 1일의 만세 운동에 나섰던 민중들은 그 ‘감-동(感-動)’의 힘으로 탄생한 거대한 개체였고, 5월의 광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성이 꼭 생물학적인 생명들을 관통하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생성의 감응을 기계의 발명과 연관시켜 생각한 사람은 질베르 시몽동이다. 

질베르 시몽동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발명을 기계와 인간과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이라는 사태로 설명한다. 인간이 고안하고 만드는 것이 분명한 기계에 대해 생성을 말하는 것은, 기계는 인공물이라는 통념을 뒤집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성이란 신의 창조를 상상하듯이 마음먹은 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성은 특정한 조건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지 창조가 아니다. 시몽동은 기계의 발명이 인간의 사유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때 사유작용이란 수학문제를 풀듯이 외부적인 촉발 없이 논리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기계는 논리적 흐름을 따라서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 조건은 발명가와 기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의 마주침에서 하나의 계열을 획득하는 것이고, 그 획득은 사유작용이 아니라 오직 감-동(感動)의 결과라는 것이다.

기계란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동차 엔진만 해도, 가솔린, 실린더, 공기, 등등이 조합된 것인데, 각각의 요소들은 기계의 부품이기 이전에 모두 자연물이다. 말하자면 가솔린에는 가솔린의 성(性)이 있고. 공기에는 공기의 성(性)이 있다. 이들이 모두 자동차 엔진이 될 것을 원할 리도 없고, 자동차 엔진이 되기 위한 성(性)의 벡터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발명가는 자동차 엔진이라는 하나의 계열을 포착하는 것이고, 이 포착은 가솔린, 공기, 실린더 등등의 서로 이질적인 성(性)들이 우글거리는 잠재성속으로, 시몽동의 용어로는 전개체적인 힘들 속으로, 발명가의 사유도, 환경도 빨려 들어가서 중(中)이 됨으로써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마치 혁(革)괘의 불과 물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 듯이 다시 살기 위해 모두 죽는 그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새로운 생성의 조건을 현행화 시키는 것, 다시 말해 절(節)에 맞게 정(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발명이다. 그래서 발명은 창조가 아니라, 인간도 기계도 그를 둘러싼 환경도 저 중(中)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서 마침내 새로운 절(節)에 맞추는 것, 곧 인간-기계-환경이 연합된 새로운 존재의 생성이다. 천지는 오직 생성함으로서만 제자리에 있을 수 있고, 만물은 생성됨으로서만 번성할 수 있다. 요컨대 “‘중(中)’과 ‘화(和)’가 지극해지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란다.”

글_최유미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 10점
질베르 시몽동 지음, 김재희 옮김/그린비


댓글